도박판에서 문득 깨닫다 “불확실한 인생”… ‘슬롯’

  • 입력 2007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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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이라는 소재에 솔깃해 ‘슬롯’(문이당)을 든다면 난감해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타짜’ 같진 않다. 배경은 ○○랜드 카지노, 제목의 슬롯머신을 비롯해 블랙잭, 바카라, 룰렛 같은 도박 게임이 이어진다. 그렇지만 소설은 흥미진진하다기보다는 매우 진지하다.

캐나다 유학 뒤 귀국한 2002년, 작가 신경진(38) 씨가 가장 먼저 ‘문화충격’을 느낀 것은 몰아치는 로또 광풍이었다고 한다. 온 국민을 들뜨게 한 ‘한탕주의’의 실상을 보려고 신 씨는 강원 정선군 카지노를 찾았다. 제3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첫 장편 ‘슬롯’은 그 카지노 체험에서 나왔다.

헤어진 여자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카지노로 가자.” 10억 원이 있다는 여자의 말에 흔들리고, 이혼을 했다는 말에 따라나선다. 처음 발 디딘 카지노는 영화처럼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다. 시장통 같지만 긴장감이 엄청나게 팽팽한 게 다르다. 카지노의 호텔 수준 뷔페는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끼니만 때우고 나오는 구내식당 같은 분위기다. 눈이 충혈된 한 사내는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2만 원만 달라더니, 돈을 받고는 다시 게임장으로 향한다.

화자는 10억 원을 들고 도박에 뛰어들지만, 좀처럼 게임에 집중할 수 없다. 확률의 게임이라는 도박을 하면서 화자가 점점 실감하는 것은 인생과 사회의 불확실성이다. 도박은 단 한 명이 판돈을 챙기는 지극히 불평등한 게임이지만,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생각에(실은 착각에) 사람들은 도박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작가의 말대로 카지노는 “불합리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 주는 공간”이다. 평론가 김미현 씨는 “이 소설을 읽고도 도박을 한다면 인생을 모욕하는 사람이고, 이 소설을 읽고도 도박을 해 보지 않는다면 인생에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했다. 소설의 주제를 잘 나타내는 평이다. 도박을 통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들여다본 것, 이것이 ‘슬롯’의 메시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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