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밖 본드걸, 본드 엉덩이를 걷어차다

  • 입력 2007년 2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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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웃겨 죽는다. 발랄한 신예 작가 오현종(34) 씨의 새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문학동네). 제목대로 이건 본드걸 얘기다. 본드가 아니라 본드걸이 주인공이라는 데서 이 소설의 주제는 일찌감치 암시된다.

세상에 본드걸이 주인공인 007 영화가 있나. 사람들은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주인공의 자기소개 대사는 술술 따라 해도, 열 몇 명 되는 본드걸은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오 씨는 그 ‘걸들’ 중 하나를 콕 집어 ‘이름: 미미, 국적: 대한민국’이라는 설정을 덧붙였다.

소설은 007과 미미의 임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시점부터 시작된다. 모든 본드걸은 임무를 마치고 다음 시리즈에 재등장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미미의 운명은, 소설 시작하자마자 끝이다. 영화의 엔딩은 본드와 본드걸의 달콤한 키스신이지만, 미미와 본드의 일상은 ‘구리기만 하다’. 본드가 지독한 ‘마초맨’이어서다. 일 없는 날이면 종일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고, 복잡한 대화를 귀찮아하며, 다짜고짜 섹스부터 하는 남자. 그러다가 느닷없이 일하러 나가야 한다며 벌떡 일어서는 남자. 그리고 다음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다른 본드걸이 옆에 있다.

“한번 본드걸은 영원한 본드걸이잖아요.”

“당신이 뭘 잘못 알고 있나 본데, 본드걸은 원래 일회용이야. 한번 사랑받고 퇴출당하는 운명이라고.”

그렇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미는, 본드걸이 아니라 본드가 되기로 한다!

본드한테 복수하려는 ‘본드걸의 본드 되기’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다.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빠른 전개에, 무거운 메시지가 드러나고도 신파조로 흐르지 않는 긴장감을 높이 살 만하다. 결국 주변인의 자기실현 얘기잖아, 라고 몰아붙이지는 말 것. 그 오랜 주제를 이렇게 유쾌 상쾌 통쾌한 상상력으로 버무린 얘기는 드물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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