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4년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美개봉

  • 입력 2007년 1월 29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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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이젠 더 핵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핵을 발사하면 상대국도 보복 공격을 할 것이고 결국 핵 공격을 한 나라, 받은 나라 할 것 없이 모두 망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보 중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섣불리 선제공격을 감행할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1999년 사망한 미국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1964년 1월 29일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서 이런 순진한 믿음이 꼭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큐브릭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우리 모두는 그의 작품을 모방하느라 급급했다”고 극찬했던 거장(巨匠)이다.

영화 속의 잭 리퍼 장군은 심각한 정신병자다.

그는 미국 땅에 잠입한 소련의 스파이들이 수돗물에 이물질을 타 미국인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기지 안의 라디오를 모두 없애버리라고 지시한다. ‘빨갱이’들은 주로 라디오로 명령을 수신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도 미국 수뇌부는 공산당의 이런 음모를 모르고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나서서 선제 핵 공격을 해야 냉전 시대가 끝날 것이다.”

그는 한 마디로 결벽증과 피해망상증, 거기에 공격성까지 가미된 ‘종합 사이코’였다.

리퍼 장군은 드디어 핵무기를 장착한 폭격기 부대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핵 공격이 인류의 공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는 합리적 판단능력을 상실한 터였다.

‘대단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다. 그럼에도 우리가 웃지 못하는 것은 핵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가정(假定)이 무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대통령도 아닌 일개 장군이 핵 공격 명령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대통령 유고(有故) 등 긴급 상황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작전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뒤늦게 공격 중단을 명령했지만 한 전투기는 교신이 끊긴 상태였다.

소련은 핵 공격을 받으면 알아서 작동하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리퍼 장군 같은 정신병자도 이 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하다.

이렇게 몇 가지 그럴듯한 단계만 거치면 인류가 한순간에 멸망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디 현실 세계에서는 리퍼 장군 같은 정신병자가 권력을 쥐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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