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가 된 386들‘아줌마 혁명’]<3>일의 포트폴리오를 바꾼다

  • 입력 2007년 1월 2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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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수진 기자
그래픽=김수진 기자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유난히 강했던 주부 박모(42·경기 용인시 보정동) 씨.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이 거의 사라졌다. 직장생활 하는 친구들이 여유 없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반듯하게 잘 커주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삶도 그다지 헛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성공한 친구들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Chief Executive Officer)라면 박 씨는 가정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CHO(Chief Household Officer)라는 자부심으로 산다.

“바깥일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면서 아이들의 기쁜 일, 슬픈 일을 속속들이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엄마로서의 보람인 것 같아요.”

꼭 자녀 교육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박 씨 같은 요즘 40대 주부들은 ‘직업=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하려는 시도를 한다.

나이 마흔을 넘긴 주부들이 원하는 직업을 갖기 힘든 사회적 여건 탓도 있지만 그들 스스로 ‘일’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교육받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고 무급의 일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지난해 20년 살림 노하우를 담은 ‘가정 CEO 아줌마의 살림경영’을 펴낸 주부 유재희(48·서울 양천구 목동) 씨는 주부로서의 자긍심이 남다르다.

유 씨는 “빨래, 밥, 청소는 돈만 주면 다른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맡길 수 있지만 자녀 교육, 재테크, 가족 관계 조정 같은 일은 그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주부들이 집안일만 한다고 무가치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부 이선미(40·서울 성동구 왕십리동) 씨도 “바깥일이 공적인 인정을 받음으로써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면 주부로서의 일은 가족으로부터 사적인 인정을 받음으로써 또 다른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프로 주부’들의 탄생은 요즘 심심치 않게 출간되고 있는 주부들이 직접 쓴 자녀 교육, 요리, 살림살이 관련 서적들의 붐과 무관하지 않다.

출판사 ‘지상사’의 김준균 단행본 팀장은 “사회와 가족 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해지면서 가정 내 주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것 같다”면서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 주부의 이야기가 주부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사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와 함께 ‘일’의 의미를 확대하는 것 또한 요즘 40대 주부들의 특징. 재교육, 봉사, 취미생활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라 여기며 일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확대해 나간다.

얼마 전 친정 엄마로부터 ‘너는 집에서 노는 애가 뭐하는데 그렇게 바쁘냐’는 소리를 듣고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주부 조모(42·서울 강남구 도곡동) 씨. 조 씨는 “왜 사람들은 집에 있다고만 하면 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잠시 경쟁적인 성공의 개념에서 벗어나 보면 보수는 없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활동이라면 얼마든지 나만의 ‘일’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제부터는 누구나 긴 수명의 혜택을 받는 만큼 다양한 활동을 일의 범위에 포함시켜 자신만의 의미 있는 인생 후반 설계를 다시 해나가야 하는 시대가 아니냐는 것.

전업 주부이지만 식지 않는 ‘배움’의 열정으로 각종 강좌를 순례하며 자기 계발에 부지런한 주부 권모(46·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씨는 “이곳저곳 강좌를 찾아다니다 보니 나처럼 꼭 일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자기 도전을 위해 공부거리를 찾는 주부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면서 “공부는 돈을 못 벌 뿐이지 성장한다는 측면에서는 일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고학력 주부들의 봉사가 활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봉사활동 또한 확장된 일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중년 여성들도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3년 전 19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전업 주부로 돌아선 김지은(44·경기 성남시 수내동) 씨는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 바쁘다. 엄마들 모임에도 참석하고 집 근처 청소년회관과 아트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도서 관련 업무와 공연지원 업무 봉사를 하고 있다는 김 씨는 “맞벌이를 하다 외벌이가 되다 보니 경제적으로 다소 위축되는 경향은 있지만 봉사를 통해 서로 이해관계에 얽혀 있지 않은 사람들과 순수한 만남을 가질 수 있고 또 심리적인 만족감도 느낄 수 있어 삶이 예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주부들의 이런 의식 변화에 대해 호남대 김기태(커뮤니케이션학) 교수는 노동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예전에는 일해서 돈을 버는 직접적 노동만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지만 요즘에는 휴식이나 레저 또한 재충전 혹은 재투자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추세라는 것. 다시 말해 일하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고 노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노동 가치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가사 노동의 가치에 대한 경제적 의미도 새롭게 부각되고 재산 분할청구권 같은 일련의 제도 개선도 주부들이 일의 포트폴리오 구성을 다양하게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

■ ‘프로주부’ 등장배경…인터넷 급속 보급 자아실현 길 쉬워져

예전에는 주부 스스로 맞벌이 주부가 살림하는 주부보다 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프로주부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일이냐 가정이냐를 두고 선택할 때 일이 아닌 가정을 ‘선택’하는 것을 ‘어쩔 수 없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중에는 자녀 교육과 가사 일을 열심히 하면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진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평생 일을 찾겠다는 사람도 많다.

어차피 요즘은 남자들도 제2, 제3의 직업 준비를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재투자하고 있지 않는가, 또 어차피 준비도 안 된 지금 나가봤자 보험이나 다단계 그런 일밖에 더 하겠는가. 그런데 준비할 시간과 재주(주부의 특성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도 많은 주부인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차분히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것 같다.

또 하나 프로 주부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해진 것도 한몫을 했다. 비록 월급은 없어도 자아실현만큼은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게다가 요즘에는 인터넷을 수단으로 수입을 올리는 경제 활동을 하는 주부들도 많아졌다.

인터넷의 보급은 주부들로 하여금 꼭 일을 하지 않아도 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사이트에서 40대 주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사이버 작가’다.

30대 주부들이 육아나 취미에 관심이 많은 반면 사이버작가 코너에 등장하는 40대 주부들은 소설, 시, 에세이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글을 올리고 있다.

이 코너가 특히 40대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인생의 완숙기 한가운데 있는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풀어 놓을 이야기도, 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 주부들은 “소녀적 작가의 꿈을 실현하게 되어서 기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풀어 놓을 수 있어서 보람 있다. 그리고 바깥세상과 소통하며 무엇보다 나도 사회의 일원임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글=아줌마닷컴 황인영 대표

정리=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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