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책의 향기]헤세의 ‘데미안’을 만나 이야기해 볼까

  • 입력 2007년 1월 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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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가족을 만났다. 그리고 학교 가서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난 게 성장기에 내가 만난 인간의 전부였다. 내 인격 형성에 영향을 끼친 실제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현실이 아닌,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나의 정신세계 형성에 더 크게 기여했다. 고모가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아버지는 고모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드디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해주는 이야기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동적인 환상 몰입이 시작된 것이다.

안데르센의 ‘백조 왕자’를 읽는다. 되풀이해서 읽는다. 읽을 때마다 숨 막히게 조마조마했다. 공주로 태어난 여자아이가 마술에 걸린 오빠들을 구출해 내는 이야기다. 오빠들은 백조가 되어서 하늘을 날고 공주는 공동묘지로 가서 거기서 자라는 거친 풀로 오빠들의 옷을 짠다. 그 옷이 다 마련될 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오빠들을 백조에서 왕자로 되돌려 놓는다. 그때 나는, 질투심에 마술을 걸어 남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책 속에서 나쁜 사람을 만났다. 그 나쁜 사람이 주는 고통을 대리 체험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는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선과 악을 동시에 갖춘 아프락사스라는 존재를 알았다. 드디어 책 속에서, 비로소,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진정한 인간을 상상으로 체험한다. 헤세는 나쁜 사람이 아닌 그냥 사람 속에도 선과 악이 동시에 들어있다는 현상을 당당히 표현한다. 현실 세상에서는 나쁜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헤어지거나 도망가고 나서야 그 인간이 나쁜 사람이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짐작될 뿐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자체가 전율이었다.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는다. 너무도 독특한, 개성적인 인생들이 펼쳐진다. 선악의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개인은 그저 자신의 몸속에 숨어 있는 나침반을 바라보고 광활한 우주를 항해하는, 끝없이 새롭게 적응해 가는 수천억 마리의 바퀴벌레다. 도저히 가지런히 정리될 수 없는 돌연변이들이다. 항상 돌연 변천한다. 그리고 그 변천된 사실이 그대로 저장되고 유전된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는다. 젊은이들의 황당한 열정을 맛본다. 전혀 희망 없음에도 완전 비참함 속에서도 들뜨고 붕붕거리면서 쉬지 않고 움직인다. 묘한 느낌으로, 정리할 수 없는 패배감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되었다.

장 주네의 ‘도적일기’를 읽는다. 인생관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린다. 내 정신의 틀이 새롭게 짜여진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말을 지금까지도 암송한다.

“나폴레옹은 태양이 빛나는 환한 대낮에 군중의 환호 속에서 이 길을 간다. 우리는 달빛조차 피해서 완전히 어두운 밤길을 경찰에 쫓기는 몸으로 똑같은 길을 간다.”

몸속에 마약을 숨기고,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유럽 대륙을 종단하는 밑바닥 청년들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여기서 선과 악은 서로의 흔적도 없이 녹아서 시궁창 속으로 흘러든다. 물론, 지금 내가 외운다고 우기고 있는 이 문장은 정확하게 원문과 일치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화가 김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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