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인문학 지킴이’는 신문”

  • 입력 2006년 12월 2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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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이 1938년 동아일보에 65회 연재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전서에 대한 기고(위),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관용(아래의 오른쪽)과 독일에서 활약하던 철학박사 김중세를 소개한 1923년 동아일보 기사.
최익한이 1938년 동아일보에 65회 연재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전서에 대한 기고(위),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관용(아래의 오른쪽)과 독일에서 활약하던 철학박사 김중세를 소개한 1923년 동아일보 기사.
‘자주독립을 잃어버린 민족은 시대 조류를 자유스럽게 결정하는 능력까지도 상실한 민족이다. 이 같은 상태를 계속해 나간다면 시대뿐 아니라 시대와 더불어 민족까지도 그 운명을 좌우하는 외세에 지배될 것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오직 이 민족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야 한다.’

근대 독일의 사상가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연상시키는 이 강건한 문장은 철학자 이관용이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1922년 10월 동아일보 1면에 16회에 걸쳐 기고한 ‘사회의 병적(病的) 현상’의 일부분이다.

이관용처럼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철학자들은 강단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강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등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으며 이들이 자신의 사상을 국민에게 전달하는 데 신문이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일제강점기 신문에 나타난 한국의 철학사상’을 연구 중인 영남대 한국근대사상연구단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등 이 시기의 18개 신문에 등장한 철학 관련 기사를 조사한 중간 결과를 19일 공개했다.

이 시기의 국내 신문에 나타난 철학 관련 기사를 실증적으로 조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단은 22일 영남대에서 이런 내용을 토대로 심포지엄을 마련한다. 심포지엄에서는 일제강점기 신문을 통해 본 실학과 양명학, 동서양 철학의 수용 등에 관한 논문과 자료가 발표될 예정이다.

연구단이 조사한 철학 관련 기사는 3198건. 이 가운데 동아일보에 게재된 경우가 1616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다음은 조선일보로 645건이었다. 그 외 조선중앙일보와 시대일보 등에 937건이 실렸다.

철학을 전공한 10여 명으로 구성된 연구단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남아 있는 신문자료 중 철학 관련 기사를 일일이 확인했다. 말투가 요즘과는 다른 데다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아 연구단은 돋보기를 이용해 한 자씩 한글로 옮겨야 했다.

게재된 기사는 당시 철학자들의 활동 내용을 비롯해 단편적인 글에서부터 장기연재물, 지상논쟁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연구단장인 영남대 최재목(46·동양철학) 교수는 “일제강점기는 흔히 암흑기에 비유되지만 당시 신문은 근대 초기 철학자들이 당시 현실을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던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며 “충분한 기초조사를 통해 이들의 활동을 재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이 시기에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철학자로서는 거의 잊혀졌던 이관용과 김중세(1882∼1946?)의 행적을 발견한 것은 수확.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이관용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를 다녔다. 다시 스위스로 간 뒤 취리히대에서 ‘의식의 근본사실로서 의욕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3·1운동 당시에는 유학생 신분으로 파리강화회의에도 참가했으며, 1923년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교수를 거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1925년 2월에는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취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사회의 병적 현상’이라는 동아일보 기고문을 통해 당시 서구의 전반적인 지성의 흐름을 소개하는 한편 일제강점기에 놓인 한국의 현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양하게 표출했다.

그는 1933년 한국 최초의 철학회인 ‘철학연구회’를 조직하고 순수철학 전문지인 ‘철학’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추구했으나 그해 8월 청진의 해수욕장에서 익사했다.

신문들은 이관용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기사를 잇달아 게재하며 그를 애도했다.

이 시기 신문을 통해 실학을 연구 중인 대구한의대 박홍식(52·한국철학) 문화과학대학장은 “실학자 최익한이 1938년 동아일보에 65회 연재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논함’은 지금 읽어 봐도 매우 수준이 높다”며 “이 시기의 철학자들이 신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무엇보다 인문학의 대중적 소통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구=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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