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서 비판의 붓을 든 풍운아 혜강을 만나다

  • 입력 2006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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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죽림칠현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 남경 서선교에서 출토된 그림 속 혜강.
중국 남경 서선교에서 출토된 그림 속 혜강.
그는 흔히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명으로만 기억됐다. 죽림칠현이란 위진(魏晉) 교체기 정치권력을 멀리한 채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로 세월을 보낸 일곱 선비를 가리킨다. 오늘날 죽림칠현은 현실도피적 지식인의 대명사다. 그러나 그는 죽림칠현 중 유일하게 벼슬길을 사양하며 매서운 현실비판을 펼치다 정치적으로 타살된 인물이다.

그는 그중 가장 뛰어난 천재였다. 그가 살았던 위진시대는 유교를 명교(名敎)라 해서 그 허위성을 비판하고 도교적 자연과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는 학문이 유행했다. 이를 청담(淸談) 또는 현학(玄學)이라 했는데 이 청담학의 3대 명저로 꼽히는 삼리(三理) 중 2권이 39세에 절명한 그 남자 혜강(@康·223∼262)의 저서다.

그는 당대 최고의 꽃미남이기도 했다. 180∼190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풍모를 갖춘 그는 용의 풍모와 봉황의 자태를 갖췄다는 용장봉자(龍章鳳姿)의 대명사였다.

그가 남긴 53수의 시와 15편의 글이 처음으로 완역됐다. 1994년 혜강의 음악론인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 연구로 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2년엔 이를 직접 번역까지 한 홍익대 한흥섭 연구교수가 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하나로 출간한 ‘혜강집’이다.

이 책의 출간으로 죽림칠현이라는 집단 이미지에 묻혀 있던 근대적 자유주의자 혜강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의 무대였던 위나라에서 태어난 혜강은 미미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풍모와 놀라운 재주로 조조의 손녀사위(또는 증손녀사위)가 된다. 그런 그가 지방에 은거한 죽림칠현이 된 것은 사마의 가문의 쿠데타로 조씨 일문과 조조가 발탁한 인재들이 대량 학살된 뒤였다. 은인자중하던 그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친구를 위해 붓을 들었고 사마씨 가문의 권신인 종회의 음모로 처형당했다.

혜강이 처형될 당시 거문고로 연주한 ‘광릉산(廣陵散)’은 초나라 시인 굴원이 남긴 시 ‘이소(離騷)’와 더불어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 고결한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예술작품이 된다.

혜강의 이리(二理) 중 ‘양생론’이 불사장생을 지향하는 그의 도가철학을 대표한다면 ‘소리에는 본디 슬픔과 기쁨이 없다’는 주장을 담은 성무애락론은 예술철학을 대표하는 책이다.

음악을 인성 교화의 도구로 보는 유교의 예악(禮樂)적 음악관을 비판하고 그 자율성을 강조한 이 글에 대해 한 교수는 “동양뿐 아니라 서양 미학사를 통틀어 예술을 철학에서 독립시켜 바라본 최초의 이론서”라고 극찬한다.

또한 공자가 이상적 인물로 바라본 주공을 비판한 ‘관채론(管蔡論)’ 등에서 기존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비판정신과 강렬한 개성을 추구했던 자유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한 교수의 설명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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