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그림 하나, 그 안에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

  • 입력 2006년 11월 8일 16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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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환기자
홍진환기자
미술치료시간, 하나(13)는 스케치북에 온통 동그라미만 그렸다. 수십개의 동그라미가 도화지에 채워졌다. 그림인지 벽지인지 헷깔렸다. 그러나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하나의 동그라미는 사람의 얼굴로 진화했다. 동그라미는 이내 꽃으로 물고기로 변신했다. 색감도 화려해졌다. 세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준영(14)이는 스케치북 한 가운데 계속 검은 점만 찍어댔다. 깨알같은 점들이 점점 많아지고 지켜보는 지도 선생님의 호기심도 커진다. 점은 준영이의 눈에 비친 해바라기의 속씨였다. 씨를 그린 뒤 속잎을 그리고 겉잎까지 그리자 준영이만의 해바라기가 그려졌다. 해바라기의 아웃라인을 그린 뒤 그 원안에 씨를 찍어넣는 일반 아동들과는 정 반대의 접근법이다.

하나와 준영이는 모두 정신지체 2급 장애아들이다. 천주교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꿈 자람터'에 다니는 12명의 장애아동들이 15일부터 19일까지 선유도공원 기획전시실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작품 세계' 때문이었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꿈 자람터의 막내 예림(8)이는 아직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 성격도 공격적 폐쇄적이었다. 도화지에 쭉 선(\) 을 하나 그어놓고 '우리 엄마'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예림이는 그림을 그리면서 집중력이 높아졌다. 그림 그릴때 자리를 지키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나 하나, 그림 하나, 그 안에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이란 제목의 이 전시회에는 선생님들의 지도없이 순전히 아이들이 내면을 표현한 작품 170여점이 전시된다. 아이들의 그림은 뛰어낸 작품들은 아니다. 꿈 자람터의 시설장인 최희수 신부는 "잘 만들고, 잘 그리고, 잘 포장된 작품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분명 다르다. 정형화되지 않고 절제되지 않은 감성들이 도화지에 채워진다. 그게 때로는 집착과 반복으로, 때론 지나친 확대나 축소의 형식으로, 정반대의 화법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장애아들은 학습능력이 떨어진다. 지도 자체가 불가능할 때도 많다. 사회화의 지체는 약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뒤집으면 그것이 강점이다. 제도화되지 않은 자유분방함이 살아 꿈틀거린다. 지난해 자원봉사자로 아이들에게 그림을 지도했던 화가 김종정(45)씨는 "정상아들은 선생님에게 지도 받으면 손가락 다섯 개, 눈 코 입을 정확히 그리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하다"며 "장애아들은 독특한 시야로 사물을 바라보고 창의적이어서 그림맛이 아주 좋다"고 말한다.

그림은 분명 아이들과 세상간 '소통의 창'이지만 내면의 분노 스트레스 적대감이 그림을 통해 배출될 때 일시적 퇴행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나는 그림을 시작한 뒤 이불에 '지도'를 그려 한 때 부모님과 돌봐주는 선생님들을 걱정시키기도 했다.

12명의 아이들은 장애아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라는 점에서 개성이 다르다. 그림 솜씨도, 학습에 대한 열정도…. 이들에게 그림은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전히 높은 사회적 차별의 벽을 뛰어넘는데,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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