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제왕의 자리 박차고 봉사의 길로”

  • 입력 2006년 10월 3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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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을 창시한 에드문트 후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현상학을 창시한 에드문트 후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후설의 현상학과 현대철학’ 펴낸 이남인 교수

“철학을 철학의 울타리에만 가둬 온 철학자의 닫힌 마음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철학자들은 이제 ‘학문의 제왕’이라는 고고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다른 분과 학문의 연구를 받쳐 주는 서비스 정신을 펼쳐야 합니다.”

최근 ‘후설의 현상학과 현대철학’을 펴낸 이남인(48·사진) 서울대 교수는 철학이 인접 학문과 학제적 연구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1995년 한국인 학자로선 처음으로 그의 독일어 박사논문이 현상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현상학총서(phaenomenologica)’의 하나로 발간된 바 있다.

“많은 사람이 현상학을 철학의 한 분과로만 생각합니다. 현상학은 자연과학적 ‘양적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질적 연구’의 방법론으로 모든 학문에 적용돼야 합니다.”

사실 20세기 초 현상학의 등장 배경과 현재의 상황은 유사한 측면이 많다. 현상학은 물리학의 실증주의와 역사학의 역사주의, 심리학의 심리주의 등 개별 학문의 방법론이 다른 학문 분야까지 넘보는 데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현했다. 현상학이 개별 사태 영역(노에마)은 그에 해당하는 별도의 사유 방식(노에시스)이 존재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21세기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라는 경제학적 합리론과 ‘모든 생명 활동은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추구한 결과’라는 분자생물학의 논리가 다른 개별 학문의 논리까지 지배하는 시대다. ‘인문학의 위기’도 결국 특정 학문의 논리가 다른 학문의 논리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을 제창한 후설의 철학이 21세기에도 유효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많은 현대 철학자는 후설을 서구철학의 이성중심주의를 계승한 철학자라고 비판하지만 후설이야말로 진정한 다원주의자입니다. 그의 초기 현상학에선 이성이 강조되지만 후기의 반성적 현상학으로 넘어가면 본능과 감정, 운동감각이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합니다.”

이 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 후설이 남긴 방대한 미발간 유고를 읽으면서 이를 절감했다고 한다. 그에게 지난해 제50회 학술원상을 안겨 준 ‘현상학과 해석학’은 후설의 ‘초월적 현상학’과 제자였던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을 비교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후설의 현상학을 심화 발전시켰다는 기존 학계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1920년대 이후 후설의 후기 저작들에 이미 하이데거적 요소가 상당 부분 포함돼 있음을 보여 줬다. 그 후속작인 ‘후설의 현상학과 현대철학’은 후설의 현상학이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의 비판철학, 레비나스의 윤리학, 가다머의 해석학의 핵심 내용도 상당 부분 선취했음을 입증했다.

“후설을 비판한 학자는 대부분 그의 초기 저작만 보고 후기 저작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미국 현상학자 제임스 하트의 말처럼 ‘후설은 철학사의 거봉이 아니라 하나의 거봉 너머에 또 다른 거봉이 잇달아 나타나는 산맥’이니까요.”

재미있는 점은 현상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서 철학에 대한 후설과 이 교수의 화법 차이다. 후설은 철학을 ‘모든 것의 원리, 뿌리에 관한 학문’이라고 고고하게 천명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철학은 다른 학문을 밑에서 받쳐 주는 학문’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이런 겸손한 인식은 벌써 몇 년째 ‘질적분석 집담회’와 ‘경제학철학 집담회’ 등 철학과 다른 학문 간의 학제 연구를 통해 현상학을 실천 학문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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