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이탈리아 와인의 고향을 찾아서-피에몬테&토스카나

  • 입력 2006년 9월 15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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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와인명가 가야의 창업 4대손인 가이아 가야. 알바 근방 바르바레스코 와이너리의 지하셀러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와인명가 가야의 창업 4대손인 가이아 가야. 알바 근방 바르바레스코 와이너리의 지하셀러다.
이탈리아 와인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이 생산되는 피에몬테 지방의 랑게 구릉지. 이 구릉지는 도시 알바를 중심으로 넓게 발달해 있는데 가야, 피오 체사레 같은 와인명가가 부근에 있다.
이탈리아 와인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이 생산되는 피에몬테 지방의 랑게 구릉지. 이 구릉지는 도시 알바를 중심으로 넓게 발달해 있는데 가야, 피오 체사레 같은 와인명가가 부근에 있다.
700년 역사의 프레스코발디 와이너리가 가문의 와인을 보관하고 있는 카스텔로 니포차노(토스카나 주). 홍보담당자가 4년 전 건축 1000년을 맞은 이 고성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700년 역사의 프레스코발디 와이너리가 가문의 와인을 보관하고 있는 카스텔로 니포차노(토스카나 주). 홍보담당자가 4년 전 건축 1000년을 맞은 이 고성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산타빅토리아의 비밀’.

혹시 이 영화 기억하시는지.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연합군에 밀려 퇴각할 무렵. 무대는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

독일군이 몰려온다고 하자 주민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애써 만든 포도주를 모두 뺏길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결정한다. 포도주를 몽땅 마을 뒷산의 동굴에 숨기기로.

1970년대 초 까까머리 중학생 때 중간고사를 마치고 단체로 관람한 영화다. 그런데 이곳을 지난달 이탈리아 여행길에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알프스 산맥 남쪽의 피에몬테 지방에 있는 알바(Alba)라는 중세풍 도시다. 여기 ‘피오 체사레’ 와이너리(양조장)에서 만난 현지인이 영화 이야기를 듣더니 기자를 차에 태워 마을이 보이는 근처까지 데려갔다. 알바는 토리노에서 북쪽으로 알프스 산맥을 향해 90km쯤 떨어진 작은 도시. 그 유명한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의 생산중심지다.

올여름의 이탈리아 여행 길 주제는 와인이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피에몬테와 토스카나, 두 지방. 이곳은 이탈리아 와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주산지다. 100년 이상 와인을 만들며 이탈리아 와인의 자존심이 된 유서 깊은 와인 명가를 찾았다. 피에몬테의 안젤로 가야(Gaja)와 피오 체사레(Pio Cesare), 토스카나의 마르케시 데 프레스코발디(Frescobaldi)다. 이 세 가문의 이름은 애호가라면 한 번쯤 맛보았거나 이름을 전해 들었을 세계적인 명품 와인의 명칭이기도 하다. 올해로 가야는 147년, 피오 체사레는 125년, 프레스코발디는 700년 역사를 맞았다.

와인에 관심이 있다면 이것만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술은 물로 빚지만 와인은 단 한 방울의 물도 넣지 않고 오로지 과즙으로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물맛에 좌우되는 여타 술과 달리 와인의 맛과 품질은 포도에 의해 결정된다. 중요한 것은 그 맛 자체도 와인이 저마다 ‘성격’을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성격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맛이 들어감을 말하는데 같은 품종 포도의 와인이라도 포도밭 조건에 따라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 햇볕의 조사(照射) 각도, 포도밭의 방향과 고도, 토양, 주변의 미세 기후 등등.

이탈리아 와인이 다양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건이 천차만별인 허다한 구릉에 포진한 제각각의 밭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세 가문은 그런 성격을 잘 살려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을 만들어 낸 장인정신의 최고봉이다.

이탈리아의 지형은 특이하다. 오르락내리락 언덕 천지요 구릉의 바다다. 우리의 산처럼 이 나라는 거대한 구릉이 전 국토를 지배한다. 이탈리아 포도는 구릉의 비탈이 텃밭이다.

○ 안젤로 가야―피에몬테의 고집불통 와인명가

알바의 산동네 디아노. 거대한 구릉의 바다가 온통 포도밭으로 뒤덮인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골마다 옅은 안개가 드리우고 마루마다 마을과 고성을 이고 있는 모습. 이탈리아 최고 와인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의 고향, 랑게 구릉이다. 여기서는 오직 ‘네비올로’라는 토종포도만 재배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쪽에서 재배하면 ‘바롤로’, 저쪽에서 재배하면 ‘바르바레스코’ 와인이 된다. 정반대의 성격은 서로 다른 포도밭 조건에서 온다.

알바에서 구릉의 산길을 차로 오르기 10분쯤. 해발 600m 높이의 바르바레스코 마을이 나온다. 1970년대 이탈리아 와인을 세계 최고 반열로 끌어올린 와인명가 ‘가야’의 고향이다.

반겨준 이는 대표 안젤로 가야의 딸 가이아 가야 씨. 몇 년 전 매입한 중세 성을 개보수 하느라 한창 바쁜 와중이었다. 가야 일가가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859년. 현재 4대째로 아버지와 아들, 딸이 이곳과 바롤로, 토스카나의 포도밭을 운영하고 있다.

가야의 명성은 안젤로 가야의 고집에서 비롯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포도농가는 모두 와인회사에 종속돼 있었어요. 그걸 깬 분이 아버지입니다. 모두가 포도밭을 팔고 이사갈 때 아버지는 그 포도밭을 사들여 와인 주조를 시작했죠.”

가이아는 아버지의 판단이 고집으로 비칠 때도 많지만 결국은 가야와인의 ‘줄기세포’가 됐다며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2002년은 악몽의 해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박과 비가 쏟아졌지요. 시기 결정은 아버지 몫인데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고집을 부리다가 그만 1년 농사를 망친 거지요.”

그해 가야는 피에몬테에서 가야와인을 만들지 않았다. 1992년 1984년 1977년 빈티지도 마찬가지.

가야는 토스카나에도 포도밭을 갖고 있다. 1996년부터 생산 중인데 와인 이름은 ‘카마르칸다(Ca'Marcanda)’.

여기서도 안젤로 가야의 고집이 드러난다. 팔지 않겠다는 포도밭 주인을 무려 열아홉 번이나 찾아가 설득해 매입한 포도밭이다. 카사(집)와 마르칸다(피에몬테 방언으로 ‘협상’이라는 뜻)를 합성한 이름에 내력이 잘 담겨 있다.

○ 피오 체사레―장인정신의 극치

알바의 랑게 구릉에는 또 하나의 명품와인이 있다. 피오 체사레(Pio Cesare)다. 이 집안은 동양처럼 성을 앞에, 이름을 뒤에 붙이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와인 양조는 1881년 시작해 현재 4대째. 증손자 피오 보파의 고집 역시 안젤로 가야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싱글 빈야드 와인(한 밭, 한 품종, 한 종류 와인)’이라는 가문의 전통을 철칙으로 고수한다. 포도 품질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아예 생산조차 하지 않는 고집은 안젤로 가야와 똑같다. 그래서 피오 체사레 와인은 생산량이 적어 맛보려 해도 쉽지 않을 정도다.

알바 시내의 셀러(저장고)에 들어서자 대표인 피오 보파의 조카 피오 벤베누토가 맞아 주었다. 수백 년은 될 듯해 보이는 고풍스러운 석조건물. 피오 체사레의 125년 역사다.

“송이마다 좋은 포도알만 손가락으로 집어내 씁니다.” 안내하던 벤베누토는 “좋은 포도에서 좋은 와인이 나온다는 소박한 진리가 가문의 좌우명”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알바 시내 뒤편에 있는 해발 700m 구릉의 꼭대기. ‘바르바레스코 일 브리코’라는 와인 생산지다. 여기서는 바르바레스코 지역 구릉의 포도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 포도로 만든 와인은 ‘바롤로 오르나토’와 마찬가지로 52세의 경영자 피오 보파가 새로운 방식으로 전통의 풍미를 구현한 신개념 와인이다.

○ 프레스코발디―700년 역사의 귀족 와인가문

피렌체(토스카나 주 수도). 르네상스기 대부호 메디치가의 고향이자 미켈란젤로가 천재의 재능을 발휘했던 중세 고도다. 동시에 700년 와인 역사를 잇고 있는 명가 ‘마르케시 데 프레스코발디’(마르케시는 귀족 칭호)의 고향이기도 하다. 가업은 30대째. 그동안 주 고객이 유럽 황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명성을 가늠할 수 있다. 지우세페 파리아니(수출담당 부장)는 “가문의 문서보관소에는 영국 헨리8세 왕의 서명이 든 주문서도 있다”면서 “미켈란젤로도 작품을 만들 때 프레스코발디 와인을 마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도밭은 아펜니노 산맥 자락인 토스카나의 카스틸리오네 구릉에 모두 9곳이 있다. 생산량은 연간 900만병. 피렌체 북동쪽으로 40km 거리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은 카스텔로(작은 성) 포미노와 카스텔로 니포차노부터 차례로 찾았다. 카스텔로 포미노에는 밤나무 숲 속에 112년 전 건축한 고풍스러운 목재 셀러가 지금도 있다.

두 번째로 찾은 카스텔로 니포차노는 언덕 꼭대기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성채 또한 거대해 700년 와인 가문의 중후함을 겉으로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특별한 것을 보았다. 가문의 와인을 저장해 두는 셀러다. 프레스코발디 가문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탄생을 기념해 그해 빈티지 와인(500병)을 저장해 두는 곳이다.

나무판자로 만든 명패 아래 수백 병의 와인이 먼지를 뽀얗게 쓴 채로 잠자고 있었다. 소유자는 이 와인을 평생 자기 뜻대로 사용하는데 생일파티라든가 선물용으로 제공한다.

세 번째로 찾은 곳은 니포차노에서 한 시간 거리의 ‘루체 델라 비테’. 1995년 이탈리아와 미국의 와인명가인 프레스코발디와 로버트 몬다비의 조인트벤처 현장이다. 당시 두 가문의 합작은 와인 역사상 기억할 만한 사건으로 기록될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이날 저녁 피렌체의 중심가에 있는 가문 직영 레스토랑을 찾았다. 이름은 역시 ‘프레스코발디 레스토랑&와인 바’. 프레스코발디 가문의 향취를 와인과 음식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멋진 식당이니 피렌체 여행길에 반드시 들러보시도록.

글·사진=피에몬테·토스카나(이탈리아)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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