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로 소설속 그 카페 찾아간다… GIS과학과 문학의 만남

  • 입력 2006년 7월 7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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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애는 그녀에게 케이크를 건네고는 다시 화원으로 들어간다. 수애의 뒷모습에 삿뽀로 우동집 간판이 겹친다. 그녀는 파리바게뜨 앞에서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선 채로 수애의 흰 종아리가 화원 앞 보도블록에 나와 있는 푸른 물통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 소설가 신경숙은 세종문화회관 옆 골목의 한 꽃집을 배경으로 평탄치 않은 한 여성의 삶을 소설 ‘바이올렛’에 담았다. 소설 속 공간은 주인공의 동선(動線)을 따라 꽃집에서 같은 골목길의 스파게티집, 인근 주차장, 한 상가건물 지하의 재래시장 등으로 옮겨 간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꽃집과 스파게티집, 언덕길 등 대부분의 장소가 실제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첨단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해 문학작품 속 배경을 현실로 끌어내려는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 소설 속 공간 현실로

상명대 지리학과 이은숙 김일림 정희선 교수팀과 지리정보화 전문기업 쓰리지코어 연구팀은 작년 12월부터 서울 종로와 관련된 문학작품과 작가 정보를 담은 위치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있다. 기존 GIS에 문학작품 정보를 추가한 개념이다. GIS는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사진에 지질이나 인구 통계, 상하수도 배관 등과 관련된 정보를 결합한 시스템이다.

이 교수팀은 1930년대 이후 발표된 소설 가운데 종로와 관련된 120편을 뽑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지역과 관련 정보를 DB로 정리했다. 또 종로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작가들의 정보도 함께 저장했다.

DB는 이상, 박태원, 정비석, 김승옥, 조정래, 신경숙, 하성란 등 100명 가까운 소설가와 그들의 작품, 위치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날개’ ‘오감도’로 유명한 작가 이상(본명 김해경)도 종로와 인연이 깊다. 그는 1912년부터 1933년까지 20년 이상을 통인동 154번지의 한 한옥에서 살았다. 주요 작품에 등장하는 무대 역시 종로였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작가 이상과 그 주변인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 김연수 소설 ‘달빠이, 이상’에 등장한 주인공도 통인동 이상의 집 인근에 실제 있는 은행 옆 호프집에서 술을 마신다.

지금은 창경궁 복원 사업으로 사라졌지만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에 등장하는 창경원 내 수정궁도 실존했던 공간이다. 월북작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 나오는 청계천의 광교 , 김승옥 소설 ‘역사’에 등장하는 동대문 인근의 함흥집도 DB에 포함됐다.

○ 전자태그 기술로 ‘구보씨 하루’ 간접 체험

소설 속 공간의 부활은 ‘전자태그(RFID)’와 휴대단말기 기술이 결합하면서 조만간 일반인에게 다가갈 전망이다.

쓰리지코어 부설연구소 장은미 소장은 “이들 문학공간에 전자태그를 달아놓으면 휴대단말기 등을 통해 작품에 관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태그란 바코드 역할을 대신하는 깨알만 한 전자칩으로 10여 m 떨어진 단말기로 정보를 전송한다. 주로 제품에 붙여왔지만 최근 건물과 다리의 원격 관리를 위해 사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소설 속 문학공간을 답사하는 짧은 여행이 가능해진다. 휴대단말기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면 건물에 부착된 전자태그를 통해 문학작품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거리 자체가 살아있는 문학 박물관이 되는 셈이다.

주인공이 집을 나서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짧은 여정을 그린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은 ‘집→천변길(청계천)→화신상회(현 종로타워)→경성역(현 서울역)→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이 테마코스로 개발될 수 있다.

최근 소설 속 공간은 장소 마케팅에 실제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캐나다 정부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된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앤이 살았던 집을 꾸며 놓고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해마다 35만 명이 앤을 추억하며 이 섬을 방문하고 있다.

장 소장은 “GIS와 전자태그 기술을 결합해 장소마케팅에 활용하는 방법은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보고된 사례가 없다”며 “전통 학문인 지리학과 문학, 첨단 정보기술이 총동원된 최신 문화기술(CT)”이라고 말했다.

이어 “GIS기술로 전국에 산재한 문학관 시비 등 문학공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며 “DB 구축을 통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도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연구는 학술진흥재단 후원으로 이뤄지며 지난달 9일 개최된 대한지리학회 연례학술대회 특별 세션에서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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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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