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외규장각도 축구처럼

  • 입력 2006년 6월 22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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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외규장각을 다시 찾았다. 파리 특파원 시절 약탈당한 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한 우리 정부의 외교 교섭을 취재하면서 맺은 인연 때문이다. 얼마 전 한명숙 국무총리의 프랑스 방문 덕에 외규장각 문서가 한국에서 전시된다는데, 그 보물들을 품고 있던 건물은 잘 지내고 있는지….

강화도 고려궁지. 단칸 목조건물이 ‘外奎章閣(외규장각)’이라는 현판을 달고 덩그러니 서있다. 여전히 실망스럽다. 건물은 초라하고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볼 수도 없다. 그 안에 얼마나 소중한 보물들이 있었는지, 조상들은 왕실 기록을 어떻게 보관했는지, 누가 그곳을 지키다 프랑스군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비운의 건물만이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실제로 건물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래서야 역사의 현장을 찾은 국민 가슴에 공분(公憤)이 우러날 리 없다. 무얼 보고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반드시 찾아 와야 한다는 투지가 생기겠는가. 직원들에게 물어 보니 외규장각 문서를 돌려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외교통상부 관리조차 이곳을 방문한 흔적이 없다고 한다. 하긴 외규장각 건물 자체가 1866년 병인양요 때 소실된 뒤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 2003년에야 뒤늦게 복원됐다. 프랑스가 고문서 반환 움직임을 보이자 부랴부랴 복원에 나선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돌아올 것 같던 외규장각 문서는 왜 아직 고국을 찾지 못하고 있을까. 남의 나라 문화재를 약탈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프랑스 탓이 크지만 정부의 치밀하지 못한 반환 외교도 빌미를 제공했다. 껍데기 건물뿐인 외규장각의 현재 모습이 정부의 실속 없는 반환 노력을 잘 보여 준다.

1993년 정부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초고속열차(TGV) 판매라는 큰 이권을 앞두고 방한한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선심 쓰듯 물꼬를 텄다. 그러나 ‘상호 교류와 대여’ 방식의 반환 약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프랑스를 밀어붙이지 못한 탓이다. 몇 년 뒤 교수가 협상대표로 임명돼 부산을 떨었으나 여론의 반대에 밀려 양국의 합의를 파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한국학 수준을 우습게보고 ‘교환 방식’에 합의한 뒤 교환목록을 제시했다 수준 미달이라며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혹자는 강대국이자 특히 외교에 강한 프랑스와 맞서다 보니 어려움이 많다고 변명한다. 꼭 그런가. 그러면 독일 월드컵에서 선전 중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보라. 그들이 막강한 프랑스와 어떻게 비겼는가. 그들은 프랑스의 세계적 선수들에게 눌려 전반전엔 형편없이 몰렸지만 후반전에 상황을 반전시켜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렸다. 감독의 치밀한 작전과 선수들의 몸을 던진 압박이 어우러져 승리 못지않은 무승부를 이끌어 낸 것이다.

축구처럼 하면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외교전에서도 이길 수 있다.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해간 뒤 돌려주지 않으려는 프랑스를 몰아붙여라. ‘외교전의 압박’은 프랑스에 끊임없이 약탈자의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일시 전시 같은 꼼수로는 원죄(原罪)를 씻을 수 없다는 점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

영국의 더타임스는 프랑스가 한국과 비긴 이유를 ‘욕망의 상실’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욕망이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접촉하는 정부 대표는 ‘외규장각 문서 반환’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반드시 찾아오겠다는 욕망을 품어야 한다.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승리는 그들의 목표이고 국민의 염원이기는 하지만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정부에는 외규장각 문서를 찾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외규장각 문서 반환 외교에서도 ‘불(佛) 끄고’ ‘불(佛) 잡는’ 극적 상황이 연출돼 국민이 포효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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