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봉 교수 “대중의 역사소비시대… 주입식 안돼”

  • 입력 2006년 4월 11일 03시 02분


코멘트
《“역사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이제 역사학의 몫이 아니라 소설, 영화와 드라마의 몫이 됐습니다. 역사는 읽는 게 아니라 소비되는 시대가 됐습니다. 따라서 역사학자는 역사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올바로 소비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비평자가 돼야 합니다.” 바야흐로 역사의 시대다. 한편으로는 ‘불멸의 이순신’ 같은 역사드라마가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고, ‘왕의 남자’와 같은 역사영화가 최고 관객동원의 신화를 이루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안에선 과거사 정리라는 역사내전이 벌어지고, 밖에선 동북공정이니 교과서 왜곡이니 하는 역사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E H 카의 근대적 역사학을 넘어선 ‘열린 역사학’을 주장해 온 역사학자 김기봉(47) 경기대 교수가 최근 이런 시대적 흐름을 진단하는 2권의 역사평론서를 출간했다.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한다’(프로네시스)와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푸른역사)다.

전자가 역사가 영화와 드라마 같은 영상역사와 경쟁해야 하는 시기 ‘역사학의 위기’에 대한 처방을 담았다면, 후자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간에 ‘국사의 전쟁’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담았다. 그를 만나 이 시대 역사학의 고민을 들었다.

“근대는 전문화와 분화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역사영화는 역사를 콘텐츠로 빌려오는 데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탈근대가 되면서 그 경계가 흐려졌습니다. 사실과 허구가 결합한 팩션, 복제품이 진품의 반열에 오르는 시뮐라크르, 허구가 더 사실 같은 하이퍼 리얼리티…. 또 사실이냐 허구냐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념이라는 사실이 폭로됐습니다.”

근대역사학에서 역사는 사실과 해석으로 구성된다. 특히 사실은 진실과 동급의 신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탈근대가 도래하면서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결국 우리의 기억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란 결국 위에서 채택하고 주입시키는 집단기억이었다. 거기서 배제된 기억들이 역사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사실과 해석의 관계는 기억과 역사의 관계로 전환됐다.

“역사학이 사실과 해석에 매달리는 동안 대중은 이미 기억과 역사의 영역에 진입했습니다. 그곳은 소비자가 생산에 참여하는 프로슈머(prosumer)의 공간입니다. ‘왕의 남자’를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바로 관객이 영화가 비워 둔 이야기를 채워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역사가 가르치는 역사(teaching history)가 아니라 대중 스스로 만들어 가는 역사(doing history)라는 말은 이처럼 대중 개개인이 역사를 해석하고 그 여백을 채워 가는 현상을 뜻하는 겁니다.”

김 교수는 이런 시대에 역사학의 임무는 역사를 제대로 소비하도록 대중을 돕는 것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기억이 저마다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담론 투쟁의 공간’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안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참여정부의 과거사 청산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국가가 어떤 청사진을 갖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재단하겠다는 것은 또 다른 ‘위로부터 기억 만들기’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올바른 과거사 규명은 과거에 억압되고 사장됐던 기억들이 분출하는 장을 만들어줌으로써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나’에 대한 자기정체성 규정을 끌어내는 것이 돼야 합니다. 역사가의 역할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담론 투쟁이 타자를 악마화하는 방식으로 정치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어야 합니다.”

타자를 악마화해 그에 대한 대척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부정적 기억의 방식이 현재 동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역사투쟁의 본질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지적이다.

“한중일 3국이 국사 중심의 역사관을 고집하는 한 패권주의 취향의 역사서술은 불가피합니다. 그 경우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한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나서서 국사 중심의 역사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체의식을 고양하는 역사를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다’의 역사가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이다’의 역사여야 합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