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삶/정두영]이탈리아의 힘 ‘느림의 열정’

  • 입력 2006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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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경제와 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밀라노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형 백화점이 거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거리와 골목을 일일이 다니면서 자신이 원하는 가게를 찾아야 한다. 물론 밀라노에도 서울의 명동과 청담동 같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가 많다.

처음 밀라노에 갔을 때 사람들이 느긋한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쇼핑을 할 때에 그들은 천천히 이것저것 구경하고 동행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판매사원의 응대를 아주 너그러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판매사원 또한 자기가 한번 응대를 한 고객의 구매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다른 고객의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는다. 고객이 말을 걸어도 미안하지만 기다려 달라고 하거나 다른 판매사원에게 요청하라고 할 뿐이다.

식사를 할 때에는 더했다.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받기까지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주문 후에 음식이 나오려면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비교적 한국의 신속한 응대 속도에 익숙해 있던 필자는 너무나도 느긋한 그들의 응대에 짜증이 났다. ‘구매를 하려는 고객을 이렇게 기다리게 내버려둬도 되는 것인가’, ‘난 필요한 물품만 사고 나가면 되는데…’ 하면서 조바심도 냈다.

패션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성격상 자주 방문하게 되는 이탈리아. 그곳 사람들의 이러한 문화를 자주 접하면서 그들에게 쇼핑은 그저 구매행위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유롭게 구경하고, 입어 보고, 동행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쇼핑을 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며 일일이 거리와 골목을 뒤지면서 가게를 찾아다닌다. 걷다가 힘들면 노천카페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거나 레스토랑을 찾아가 식사를 하면서 쉬다가 다시 쇼핑에 나선다.

이탈리아는 패션, 음식, 건축, 산업, 오페라, 인테리어 등 수없이 많은 문화 콘텐츠와 관련된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우연히 마케팅 학술잡지에 게재된 기고문을 보다가 이탈리아 사람들의 문화 콘텐츠 산업 발전에 기여한 요소 중의 하나는 ‘느림의 열정’이라는 글을 보고 상당히 공감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어떠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을 투자하며, 그것에 대해 기다리면서 불평을 하는 사람도 없다. 어쩌면 이러한 ‘느림의 열정’이 문화 발전의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촌각을 다투면서 일하고 있으며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패션 트렌드 또한 이전과 다르게 급속하게 변한다. 이런 상황에서 ‘느림의 열정’을 이야기하다가는 자칫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그들의 ‘느림’이 부럽기도 하다. 문화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치 같아서다. 패션 트렌드는 급속하게 변화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예측하고 이끌기 위해서는 ‘느림의 열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두영 ㈜신원 디자인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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