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향기속으로 20선]<9>산책의 숲, 봄 여름 가을 겨울

  • 입력 2006년 3월 2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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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오솔길에서 조금 벗어난 약간 그늘진 빈 터에서 발견하게 되는 은방울꽃을 보면 마치 숲이 품고 있는 보석을 발견한 것과도 같은 흥분을 느끼게 된다. 5년 정도는 잎을 피운 뒤에야 꽃을 피우는 은방울꽃의 기다림도 기다림이려니와 오히려 사람들의 손길을 피해 거친 숲 속의 환경을 선호하는 외골수 방식의 삶을 보면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문 중에서》

‘그대들 잘 싸웠다…우린 참 행복했다.’

한국이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결승인 일본과의 3차전에서 진 다음 날 아침 신문 1면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전날의 아쉬움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봄 햇살에 목련 꽃눈의 은회색 솜털이 탐스럽다. 지난해 이맘때 듣던 CD를 찾아내 1년 만에 다시 듣는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베이스바리톤 오현명 선생의 묵직한 저음이 가슴에 사무쳐 온다. 여고 1학년 음악 시간, 소프라노 음악 선생님에게 ‘사월의 노래’를 배우며 다짐했다. 이 다음에 꼭 이렇게 살리라. 나무 그늘 아래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고 수많은 봄이 지나갔다. 여전히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얼마 전 꼭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숲이 좋아 출근을 한 시간 일찍 해 단정히 맨 넥타이에 양복 차림으로 숲 속 오솔길을 걷는 사람. 같은 장소를 매일 오가다 보니 풀과 꽃과 나무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어느 날 조그만 스케치북을 준비해 만년필로도 그리고 색연필로도 그려 온 사람. 이순우 씨가 바로 그다. 2000년부터 2년 동안 서울 서초구 염곡동의 구룡산 자락에 있는 국제협력연수센터에 근무하면서 작은 수첩 여남은 권에 정성껏 채워 넣은 글과 그림들이 ‘산책의 숲,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책으로 탄생했다.

이 책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몇 년 동안을 그렇게 골몰했을 숲 속 오솔길의 나날과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의 조건을 소중히 가꾸고 사는 사람의 향기가 고스란히 담긴 섬세하고 소박한 관찰의 기록이다.

‘봄비를 맞고 싱싱한 기운을 더하는 잎새에 비해 꽃은 그 처연한 빛깔마저 더욱 후줄근한 모습이다. 꽃잎이 꽃수술(암술)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새잎 순을 키우고 있다. 먼저 나 있던 잎새보다는 뒤늦지만 새로운 가지로 뻗어나간 줄기의 잎순을 키우는가 보다’(2000년 4월 19일 수요일)

여백엔 분홍 색연필로 참꽃 진달래 한 송이를 그려 넣었다. 이렇듯 꽃이나 나무에 대한 지식으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고 ‘나도 스케치북 한 권 사서 산책을 나가 볼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책에 나오는 봄 숲을 감상하는 첫 번째 방법은 이른 봄의 숲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기. 그리고 가끔은 두 팔 벌려 나무를 꼭 껴안아 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누구나 알게 된다. ‘나무와 하나 되는 각별한 감정 말고도 허허로운 삶,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좀처럼 갖기 어려운 특별한 기분과 느낌을 분명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엇인가에 성큼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또 그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백만 평 넘는 공원이 여섯 개나 있는 뉴욕 같은 도시가 부럽지만 그건 나라에서 할 일이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인생이다. 어디에서든 혼신을 다해 몰입하면 그곳이 청산이고, 행복은 그것을 누리는 자의 몫이니 말이다.

전옥란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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