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5년 대한제국 도량형법 공포

  • 입력 2006년 3월 2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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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의 탐욕스러운 관리들은 도량형(度量衡)을 속여 부정 축재를 했다. 백성들에게는 엉터리 측정기구를 써서 세금을 많이 거뒀으나 나라에는 정량만 바치고 나머지를 챙겼다.

그 탐관오리들을 적발하던 암행어사의 휴대품은?

우선 마패. 마패는 지방 출장길에 나선 관원이면 누구든 역마(驛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증표였다. 마패 외에 반드시 지녀야 하는 게 유척(鍮尺)이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로서 도량형을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물건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표준의 측정기구다.

동서를 막론하고 위정자는 도량형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길이(度·도), 부피(양·量), 무게(형·衡)의 기준을 통일해야 공정하게 세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도량형은 세종대에 정비됐다. 악성(樂聖) 박연(朴堧)은 문란한 아악(雅樂)의 기본 음률을 바로잡기 위하여 황종률관(黃鐘律管)을 만들었다. 이 황종률관의 길이를 척도로 나타낸 것이 황종척(黃鐘尺)이다. 황종척은 길이와 부피의 기준이 됐다. 또 황종률관에 들어가는 만큼의 물을 무게의 기준으로 정했다. 이는 마찬가지로 물 무게를 기준으로 한 프랑스 미터법보다 370년가량 앞선 과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도량형법은 다시 문란해졌다. 여러 번 정비했으나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했다.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독립국임을 선포했다. 풍전등화 같았던 대한제국은 1905년 3월 21일 제1호 법률을 공포했다. ‘도량형법’이다. 척(尺)을 길이와 부피의 기본으로, 냥(兩)을 무게의 기본으로 삼고 미돌(米突·미터)법을 병용할 수 있도록 했다.

1척은 30.303선지(先知·센티)미돌이었다. 그런데 30.303cm는 일본 곡척(曲尺)의 기준이었다. ‘독립국’ 대한제국이 도량형에서 일본에 ‘예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일제의 경제 수탈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 됐다.

대한제국은 이에 앞서 1902년 도량형기의 제조 검정 기관으로 평식원을 설치하고 미터법을 도입했다. 1909년엔 일본식 단위인 ‘돈’과 ‘관’을 도입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1961년 옛 도량형 관계법을 폐지하고 국제 추세에 따라 미터법만 사용하도록 했다.

죄다 사라진 고유 도량형을 복원해 쓰는 건 불가능한 형국이다. 하지만 지금껏 일본 도량형 단위인 돈과 평(坪)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낄 만하지 아니한가?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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