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 입력 2005년 5월 20일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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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반도의 바위 사막에 우뚝 솟아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모세가 헤브라이인을 위해 노예 해방의 깃발을 올렸던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흑인영가를 즐겨 부른다고 한다. 사진 제공 이론과실천
시나이 반도의 바위 사막에 우뚝 솟아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모세가 헤브라이인을 위해 노예 해방의 깃발을 올렸던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흑인영가를 즐겨 부른다고 한다. 사진 제공 이론과실천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잭 웨더포드 지음·권루시안 옮김/528쪽·1만8000원·이론과 실천

“사람들이 문명이라 부르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에는 사막(沙漠)으로 변한다….”(돈 마퀴스)

고대 마야문명이 허무하게 스러져 간 안데스의 죽은 도시 약스칠란. 멕시코 치아파스의 라칸드 정글을 찾은 저자는 찬란한 과거를 묻어 버린 돌무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문명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벽과 돌기둥에 새겨진 글과 그림에서 온다. 그는 마야의 폐허에서 하나의 문명을 보았다. 그들의 말, 그들의 역법, 그들의 천문학을 보았다. 인간의 지식을 보았다.

그러나 약스칠란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정글 속으로 까무러졌다. 저자는 참으로 연약하고 덧없는 문명의 본성과 마주친다.

그는 신음했다. “약스칠란의 운명은 모든 도시, 모든 문명의 앞날을 예시하는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리의 과거인가? 아니면 우리의 미래인가?”

미국 매칼래스터 대학의 인류학 교수인 잭 웨더포드.

‘칭기즈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의 저자인 그는 전 대륙의 도시와 오지를 훑으며 사라진 부족민들의 오늘과 어제를 좇는다. 야만의 낙인이 찍힌 채 서구문명의 수레바퀴 아래 피를 흘려야 했던 수난과 ‘통혼(通婚)’의 역사를 아프게 반추한다.

인류학자의 문명 탐사, 문명 여행기는 잊혀진 부족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따스하게 보듬는다. 티베트의 ‘죽은 자의 벌판’에서 치아파스 정글로 이어지는 여정은 문명이 행한 야만과, 문명 스스로 내부에서 길러 온 야만에 대한 채증(採證)이자 생생한 목격담이다.

문명은 숲을 베어 먹고 산과 강의 허리를 잘라 땅을 착취함으로써, 자연의 신비를 발가벗김으로써 자신을 살찌워 왔다.

그러나 문명은 야만을 삼키기는 했어도 소화시키지는 못했다. 문명은 단지 야만을 변경(邊境)으로 밀쳐냈을 뿐이다.

야만은 문명 속에 여전히 생존해 있다. 아니 미개(未開)는 문명 속에서 개화했다.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말은 ‘도시(city)’에서, 야만(savage)이라는 말은 ‘숲’을 나타내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그러나 야만을 찾기 위해 암흑의 아프리카나 야생의 아마존을 뒤질 필요는 없다. 문명세계의 심장부를 이루는 대도시를 들여다보라.

“세계 어느 정글에서도 나는 미국의 수도에서 벌어지는 야만과 폭력과 잔혹함을 보지 못했다. 멜라네시아의 식인종 후예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워싱턴의 밤거리에서 더 무섬을 느낀다.”

문명의 진보에도 우리는 정녕 석기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문명이 승리감에 도취된 이 순간, 지구문명이 세계의 주인임을 선언하는 바로 이 순간, 문명의 드센 불길은 사그라지기 시작하는가. 문명은 외적(外敵)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지금, 내부의 적에 더욱 취약해 보인다.

저자는 묻는다. 문명은 결국 자기 자신의 성공에 의한 희생자가 되어 가고 있는가?

“인간 속의 야만은 결코 근절된 적이 없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원제 Savages and Civilization ―Who will survive?(1994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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