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우리가 門 닫을때 그들은 세계로…‘유미유동’

  • 입력 2005년 5월 6일 17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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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유동/첸강, 후징차오 지음·이정선 김승룡 옮김/412쪽·1만6500원·시니북스

《1880년과 1881년 두 해 동안 예일대 조정팀은 미국 대학들 사이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하버드대-예일대 조정경기에서 연승했다. 역대 전적을 보면 많지 않았던 예일대의 승리였다. 이 승리는 조타수 중원야오(鍾文耀) 덕분이었다. 조타수는 대원에게 욕하고 큰소리를 쳐야 하지만 중원야오는 아주 의젓한 군자의 모습으로 뱃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조교가 계속해서 조타수는 반드시 소리치고 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자,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아무런 억양도 없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야, 이 새끼야!” 대원들은 어리둥절해 하다 돌연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중원야오는 1872년 청나라 정부가 실시한 초유의 조기 유학 프로젝트에 따라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에 간 9∼15세의 유미유동(留美幼童·미국에 유학 간 어린 아동) 120명 중 한 명이었다.

청나라 말기의 이 프로젝트는 유학기간 15년에 의식주 경비 일체를 정부가 부담하고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정부 관리로 임용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만국이 찾아와 조회(朝會)한다’고 여기던 천자의 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이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것이다.


청나라 말 국가 차원의 조기유학 프로젝트에 따라 미국으로 떠난 120명의 유동은 10년간 서양의 앞선 군사력과 과학 기술은 물론 서양의 문화를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해 돌아갔다. 이들은 이후 중국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왼쪽 사진부터 유동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의 모습과 예일대 조정팀 동료들과 함께 한 조타수 중원야오(앞줄 가운데), 1890년 성탄절에 중국에서 다시 만난 유동들. 사진 제공 시니북스

이 프로젝트는 중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예일대를 졸업한 룽훙(容굉)이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야심 찬 프로젝트였고, 이들은 청나라 정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몇 년 후 그들 중 50명 남짓이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등 명문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중국 내 정세 변화로 거센 반대에 부닥쳐 10년 만에 끝나고 학생들은 학업 도중 본국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중원야오처럼 조정팀 조타수가 되는 것은 청나라 정부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동들은 비단저고리를 벗고 운동복을 입었으며 변발을 자르고 가르마를 탔다. 날이 갈수록 이국적 분위기에 빠져들었고 일부 유동은 예수교에 들어가는 등 위험한 경계선을 넘어섰다. 중국으로 귀국하던 날, 이들은 뜨거운 환영식을 생각하며 흥분돼 있었지만 웃음기 하나 없이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을 보고 허탈감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유동들은 서양의 앞선 군사력과 과학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중국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중국의 전보사업을 열었고, 중국이 자체 건설한 최초의 철도 역시 이들의 손에서 시작됐다.

중화민국의 초대 총리가 된 탕사오이(唐紹儀), 칭화(淸華)대의 전신인 칭화학교의 초대 총장을 맡은 탕궈안(唐國安) 등이 유미유동 출신이었다. 예일대 조정팀 조타수였던 중원야오는 수년 동안 외교관을 지냈고 상하이탄(上海灘)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이 책은 당시 미국 유학을 떠났던 어린 학생들의 사연을 추적해 생생히 보여 준다. 이 이야기는 지난해 5월 중국 CCTV에서 5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중국인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줬다. 저자들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뉴욕 필라델피아 오스틴을 돌아다니며 조각난 역사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유동들의 애절한 삶을 온전하게 복원해 냈다.

이 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 앞에서 청나라 말기 서양의 근대기술을 도입해 중국의 자강을 도모하려던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역사와, 평생 개혁을 꿈꿨던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양무운동을 이끌던 주인공들의 깊은 고민도 살폈다.

당시 외국 문물 도입을 위해 빠르게 달려가던 경쟁자 일본과의 비교는 이 책이 노린 진짜 메시지일 것이다. 일본은 중국보다 1년 앞선 1871년 대규모 정부 시찰단을 세계 각국에 파견했고, 이 파견단에는 50명의 유학생도 포함돼 있었다. 메이지(明治) 일왕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아홉 살배기 여자 아이를 몸소 전송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이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고자 바다를 건너 동분서주하고 있을 즈음 조선은 어디 있었을까.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10년 세도(1864∼1873년)의 끝자락에서 쇄국정책을 고집하며 나라 곳곳에 척양비(斥洋碑)를 세우고 있었다.

원제는 ‘留美幼童-中國最早的官派留學生’(2004년).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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