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신체 부위로 ‘여자…’ 뜯어보기

  • 입력 2005년 3월 9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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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개봉된 ‘여자, 정혜’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모든 걸 말하는 영화다. ‘들고 찍기’ 기법으로 100% 촬영된 이 영화는 주인공 정혜(김지수)를 거의 1m 거리에서 뜯어본다. 이 과정에서 정혜의 무심(無心)한 듯한 각종 신체 부위는 아주 일상적인 행위들과 뒤섞여 독특한 감정을 뿜어낸다. ‘여자, 정혜’의 정혜(혹은 배우 김지수)가 가진 부위별 아름다움, 그 속에 숨은 뜻을 밝혔다. 알고 보니 정혜의 발에는 ‘사연’이, 손에는 ‘일상’이, 얼굴에는 삶에 대한 ‘태도’가 감춰져 있었다.》니….

○ 발, 감정이 보인다

정혜의 ‘감정’이 읽히는 유일한 부위다. 발은 정혜가 외부 존재와 접촉하는 유일무이한 통로이기 때문. 길거리에서 주워온 주인 없는 새끼고양이는 고단하게 잠든 정혜의 발바닥을 맛나게 핥는다(사진1). 이는 고양이가 부모 없는 정혜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나누는 순간인 동시에 그녀를 위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정혜가 죽은 엄마에 관해 떠올리는 기억도 엄마가 자신의 발톱을 깎아주는 장면이다(사진2). “발톱은 꼭 지 아빠 닮아 되게 못 생겼네” 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짓는 엄마에게 발을 맡긴다. 반면 정혜의 발은 남성성에 짓밟힌 무기력한 여성성의 끔찍한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샌들을 신겨주며 자신의 발을 만지작거리는 구둣가게 남자직원(사진3)에게 정혜가 뜬금없이 혐오감을 발산하는 대목에서, 관객은 정혜가 ‘남자의 손길’에 뼈저린 피해의식을 가질 만한 말 못 할 사연을 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각질이 없고 매끈한 뒤꿈치, 피아노 건반처럼 가지런한 발톱, 그리고 엄지발가락 끝이 버선코 모양으로 살짝 올라가 묘한 리듬감을 빚어내는 정혜의 발은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과 대척점에 서서 뭔가를 애원하고 있다.

○ 얼굴, 세상과 단절된 내면

정혜는 대부분 무표정이다. 감정 변화는커녕 약간의 홍조조차 보이지 않는다. ‘육체성’을 증발시켜 버린 이런 건조한 표정은 자신만의 성(城)을 짓고 살아가는 정혜의 단절된 내면이기도 하다. 정혜는 사랑에 고통 받는 낯선 남자와 뜬금없이 여관에 함께 들어가 그를 끌어안을 때조차 무표정이다(사진4). 정혜에 대한 영화의 이런 태도는 성적인 암시를 강하게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자의 목덜미와 귀에 대한 카메라의 시선에서도 확인된다. 정혜는 대부분 뒷머리를 바짝 묶고 나와 ‘벌거벗은’ 목덜미와 귀를 노출하는데(사진5), 이상하게도 관객이 느끼는 건 강렬한 성적 흥분이 아니라 여성성 자체가 아예 거세돼 버린 ‘초여성적(super-feminine)’ 쓸쓸함이다. 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올림머리를 내려 귀와 목덜미를 감춤으로써 여성적 이미지를 줄이고 강경대응 의지를 내비친 것과는 정반대인 셈. 정혜는 귀와 목선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에 대한 차가운 무관심을 드러낸다.

○ 손, 평범한 삶은 고단하다

정혜의 ‘피로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위. 정혜의 손은 뺨에 떨어진 속눈썹을 집어낼 때(사진6), 총각김치를 들어 아작 베어 물 때, 컵라면 뚜껑을 돌돌 말아 라면을 담아 먹을 때(사진7)처럼 일상적이고 하찮아 보이는 행동을 하는 순간일수록 중점 부각된다. 정혜의 손이 극도의 사실성을 갖는 것은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 때문(사진8). 핏줄은 ‘예쁜 여자의 무표정함’이 주는 건조한 판타지를 걷어내고 지루할 만큼 평범한 삶이 주는 고단함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낸다. 물론 배우 김지수가 ‘불꽃 연기’를 위해 핏줄을 일부러 꿈틀거리게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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