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소’…소, 큰 눈에 수천만년 언어를 머금고

  • 입력 2005년 2월 4일 16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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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은 유수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등단 16년째의 중견 시인이다. 도시화로 변화된 삶의 다양한 모습을 성찰하는 그의 시는 도시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도시적 역동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기택 시인은 유수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등단 16년째의 중견 시인이다. 도시화로 변화된 삶의 다양한 모습을 성찰하는 그의 시는 도시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도시적 역동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기택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에서 ‘소’라는 제목의 시를 실었던 그가 이번에는 아예 시집의 제목을 ‘소’로 정했다. 앞선 시집들에 등장하는 '소’들은 파리들이 모여 들어도 쫓아내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이거나 억지로 물 먹은 모습 등 불구적이거나 희화화 된 이미지라면, 이번 시집의 소는 정상적이고 평범하다는 점에서 다르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소’ 중)

소의 커다란 눈을 ‘수천 만 년 말을 가두어 둔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라는 시어에 비유한 시인은 소의 눈에 함축된 언어를 읽고, 알아들으려 애쓴다. 그리하여 도시적이어서 번다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삶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연의 모습들이 시인의 투시적 상상력에 포획된다.

‘소나무’를 보고 지은 ‘솔잎도 처음에는 널따란 잎이었을 터./뾰족해지고 단단해져 버린 지금의 모양은/잎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은 추위가 지나갔던 자국./파충류의 냉혈이 흘러갔던 핏줄자국’이라는 대목이나, 숲을 보고 길어 올린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어느 다리보다 먼 길을 걸어 온 네가 발산하는 침묵은/발 다리 달린 벌레며 짐승들이 매일 들으며 자라는 너의 침묵은/잎에서 잎으로 길로 허공으로 퍼져나가 산처럼 거대해지는 너의 침묵은’ 같은 언어들은 시인의 오감으로만 느껴지는 식물의 생명력을 표현한 절창들이다.

세 번째 시집 ‘사무원’을 통해 도시적 삶의 생태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도시화로 변화된 삶의 양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기조로 하고 있다. 시인은 도로 위에 길게 이어진 두 줄기 타이어 자국, 검붉은 얼룩과 흰 스프레이, 만원 지하철 속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나가지 못하는 노파, 텔레비전을 꺼야만 귀에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 등을 통해 도시 속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관조하며 그려낸다.

그러나 도시 내부를 흐르는 긴장과 갈등의 에너지를 사물의 역동성으로 포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기택 시의 독창성이 있다.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빌딩 사무실 안에서/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중).

그는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중견 시인이고 이수 문학상, 미당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현대 문학상 등을 두루 수상했다. 하지만 문단 행사나 모임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최근에 20여 년의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했다. “시가 생활 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사 다니면서 항상 긴장감을 갖고 삶의 주변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그는 “그러나 반복적 생활이 글 쓰는 이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협소하게 만드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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