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신춘문예]중편소설 가작 ‘시간이 나를 쓴다면’(줄거리)

  • 입력 2004년 12월 31일 16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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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석철주
그림 석철주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은 특별한 목적도 없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뭐가 될지도 모른 채로 내키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젊은이들이 나오는 것들이다. 열심히 성실히 내일을 위해 매진해 가는 꿈 많고 욕심 많고 능력 많고 돈까지 많은 애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별로 흥미 없다. 현실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쳐준 대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한 삶을 살면서, 무언가를 얻으려 아등바등하지 않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냥 하면서 그렇게 사는, 그래서 조금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어떤가, 하고 상관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진짜를 알아내는 것도 간단치는 않다.

이 소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결국 알게 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가게 되는 20대 중반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지훈과 그리고 무언가가 되어야 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고 싶은 설희.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우. 세 사람 중 화자는 지훈이다.

지훈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두 가지 직업을 거쳤지만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세상을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한 지훈의 시간은 알 수 없는 분노로 차 있다. 괜찮은 부모를 만난 덕분에 그 나이에도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그것조차 아무 이유 없이 절망적인 삶에 대한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지훈은 성우, 그리고 설희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 혹은 할 수 있는 것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그래서 지훈은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변화한다.

지훈은 통장을 펼쳐놓고 잔액을 점검해보고 있다. 무슨 핑계를 대고 계속 여기에 남아서 이렇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무엇보다는 생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시점이 왔다. 지훈은 은행의 잔액이 바닥이 난 다음에는 기꺼이 어떠한 노동이라도 할 생각이다.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대학교육을 통해 익힌 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고,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이 지훈이 소설을 쓰면서 달라진 점이다. 인내하고 애쓰고 아득바득거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식의 삶의 원칙을 오래전부터 세워놓은 지훈이 소설을 쓰기 위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

지훈은 이미 알고 있다. 그것도 충분히. 소설을 쓰는 것보다 회사에 들어가 얌전히 일하는 것이 훨씬 수입 면에서 안정적이라는 것도, 덜 힘들다는 것도, 덜 고통스럽다는 것도.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어도 하는 수 없는 것.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기꺼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하고 싶은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전제가 붙은 애정의 대상이 자신의 인생에 생겨날 줄은 몰랐다.

지훈은 사람과의 싸움을 통해 시간을 통해 비로소 스스로의 욕망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욕망조차 지훈을 좌절시킨다. 그러나 지훈은 포기하지 않는다. 낭비하고 소모하고 지치게 만들었던 시간이 자신의 내적 욕망을 깨닫게 했듯이 지금 이 시간도 언젠가는 글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는 스물아홉 살에 자신의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상황을 약간은 절망적으로 표현했다. 스물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아이도 없고─게다가 정신병이 있고─작가도 아니고. 지훈은 이제 스물여덟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그리고 작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때의 버지니아 울프보다 지훈은 한 살이나 젊고 게다가 정신병도 없으니 아주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는 살아보겠다고 결심한다.

지훈은 소설이라는 진짜 모험을 위해 아프리카로의 여정을 떠난다. 인생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다. 우리의 진짜 목적은 행복이거나 사랑이거나 평화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직업을 갖고 돈을 번다. 우리는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거나 그것을 알 수 없다. 되고 싶다고 다 될 수는 없으나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꿈꿀 자유는 있다. 지훈은 지금 꿈을 꾼다. 그래서 살아온 어떤 시간보다 지금이 행복하다.

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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