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최원식]‘아우성’에서 ‘대통합’으로

  • 입력 2004년 12월 26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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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승리한 축구경기를 보면서 히딩크 시대가 지나갔음을 새삼 실감한다. 알다시피 월드컵 4강 신화를 성취한 주역들 대신 젊은 새 힘들이, 막강하다는 독일의 전차군단을 유린했다. 무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최강을 뽐내는 독일에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독일에 맥없이 무너진 일본 쪽에서 한국팀은 겁이 없다고 분석한다. 흥미로운 지적이다. 겁이 없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서양 콤플렉스가 없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서양에 주눅 들어 온 기성세대와 달리 우리 청년들은 서양에 대해서 당당하다. 긴 고투의 터널을 지나 이제 한국사회가 이만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자만일까.

▼새해 한반도 주변환경 급변▼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동성에 과학이 결합되어야 한다. 나는 바둑을 못 두지만 내 주변에는 바둑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판이 끝난 후의 풍경들을 살피건대, 그 승부에 마음으로부터 승복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대체로 ‘어제 과음을 해서…’ 등등 여러 이유를 들어 자신의 패배를 변명한다. 이런 일이 바둑에만 그치지 않는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약간은 서글픈 경구가 은밀히 떠도는 것은 바로 이 현상이 한국 사회 전반에 미만(彌滿)해 있는 일반적 정서라는 점을 잘 일러준다.

일본은 이 반대라고 한다. 승부를 할 때는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나서지만 일단 승패가 갈리면 승리자 앞에 무릎 꿇고 정중히 한 수 배우는 승복의 자세로 돌아선다. 이 변화가 거의 표변(豹變)에 가까워서 외부인을 놀라게 하지만, 이 자세가 오늘의 일본을 만든 힘의 근본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만약 타고난 역동성에 과학적 판단을 결합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놀라운 효과를 거둘 것으로 나는 믿는다.

아우성 속에 2004년이 저문다. 새해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아니 우리는 2005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대체로 동의하고 있듯이, 내년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중차대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다.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이 이미 경고했듯이 왜곡 역사교과서 채택 문제가 내년에 일본에서 다시 일어날 조짐이다. 더구나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100주년을 맞는 내년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라니 대한해협의 파고(波高)가 거칠어질지도 모른다. 한류와 공존하는 일본의 ‘한반도 때리기’가 과연 을사조약 100주년과 한일협정 4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에서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복재(伏在)하고 있지 아니한가. 일방주의를 거두지 않고 있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권과 잃어버린 영향력의 회복을 도모하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까지 감안하면, 한국 사회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형국이다. 이 모든 것의 핵에 북한 핵문제가 존재한다. 6·15선언 5주년을 맞이하는 내년 북한과 함께, 또는 따로 주변 4강을 달래 이 어려운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도 한국 사회 내부의 대통합이 절실하다.

▼합의에 승복 대승적 자세를▼

내년은 광복 60주년, 을유년이 돌아온다. 도둑같이 찾아온 광복에 우왕좌왕(右往左往)과 좌충우돌(左衝右突) 끝에 내전을 예고하는 분단으로 치달았던 그때를 돌아볼 때, 이 상황의 도래를 남 또는 외세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곤란하다. 과학적 판단에 기초한 냉철한 자기비판을 통해서 잃어버린 광복을 어떻게 오늘의 시점에서 완성할 것인가. 다른 의견들이 억압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조차도 공동체의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한 큰 합의의 장(場) 속에 수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합의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에 ‘작은 다름’으로 존중될 때, 토론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내년에는 토론다운 토론을 해 보는 그런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치열한 토론에서 도출된 합의에 승복하는 대승적 자세로 2004년의 아우성을 시원하게 해결하는 그런 새해가 되기를 우리 모두 기도하자.

최원식 인하대 교수·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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