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金九를 생각한다…10월 1일 ‘김구 학술회의’

  • 입력 2004년 9월 22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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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백범 김구
《사회가 분열되고 나아갈 방향이 명확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과거의 훌륭한 지도자를 그리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을 기억하는 이유도 민족과 통일에 대한 그의 열망을 알기 때문이다.》

백범기념관(관장 김신·金信)은 다음달 1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개관 2주년을 기념해 ‘광복 직후의 건국운동과 백범 김구’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갖는다. 학술회의에서 학자들은 백범이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민족의 통일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어떤 사상으로 어떻게 분투했는지를 살펴본다.

● “신탁통치 아래두면 연합군이라도 침략으로 간주”

먼저 신용하(愼鏞廈) 한양대 석좌교수는 ‘열강의 한국 남북 분단 및 신탁통치 정책과 백범 김구의 노선(1943∼1945)’이라는 발표문에서 백범이 이미 광복 전부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음을 밝힌다. 신 교수에 따르면 백범은 이미 1943년 연합국의 신탁통치계획을 알고 맹렬한 반대운동을 시작했고, 만일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의 신탁통치 아래에 두면 연합군일지라도 침략으로 간주해 역사적 독립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백범이 바로 다음날부터 맹렬한 반탁(反託)운동을 시작한 것도 오랜 준비가 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 “북의 단독정부 수립 결사 반대”

서중석(徐仲錫)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남북협상과 백범의 민족통일노선’이라는 글에서 백범이 1948년 4월 평양 남 북협상에서 북에 이용당하지 않으면서 민족의 대의인 통일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고 밝혔다. 백범은 통일 독립을 이룰 대계(大計)를 토의하자고 역설했고, 북의 단독정부 수립에 분명히 반대했다는 게 서 교수의 설명이다.

● ‘대한민국건국강령’ 만들어 광복 후 국가상 구상

김희곤(金喜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백범 김구’라는 글에서 백범이 광복 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하는 동안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만들어 광복 후 수립할 국가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백범이 구상했던 ‘신민주국가’는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바탕으로 하는 삼균주의를 기본골격으로 어떠한 계급과 형태의 독재도 거부하는 민주주의 체제 국가”라고 말했다. 또 백범은 환국 이후 ‘임정 법통론’을 중심으로 오직 통일된 자주국가를 수립하는 길에만 매진했다는 것.

● “간섭없는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건설”

한시준(韓詩俊)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도 ‘백범 김구의 신국가 건설론’에서 백범이 광복 후 신국가 건설에 대한 구상을 ‘나의 소원’을 통해 천명했다고 주장했다. 백범이 구상했던 신국가는 간섭이 없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고,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국가를 세워 수준 높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하며, 각 민족마다 최선의 문화를 갖는 문화국가를 세워 서로 돕고 사는 것이었다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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