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컬렉터]<1>古세계지도 수집하는 유영구씨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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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400년 전에 제작된 세계지도 중 한국이나 아시아가 들어있는 고지도만 모으는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 그는 “지도는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도 공부야말로 책 읽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인문학 수업이라는 뜻이다.-허문명기자
300∼400년 전에 제작된 세계지도 중 한국이나 아시아가 들어있는 고지도만 모으는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 그는 “지도는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도 공부야말로 책 읽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인문학 수업이라는 뜻이다.-허문명기자
《오랫동안 수집한 물건에는 세월과 추억이 담겨 있다. 낱개로는 쓸모없는 소품일지라도 모아보면 거기에는 삶과 철학이 담기게 마련이다. 우리 주변에서 뭔가를 모으는 이색적인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

학교법인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58)은 300∼400년 전의 세계지도를 모은다. 세계지도 중에서도 한국이나 아시아가 반드시 표시된 것들이다. 벌써 10년째 모은 지도가 100여점에 이른다. 왜 하필 지도일까.

“고서(古書)를 수집하다가 책의 부록이나 별지에 붙어 있게 마련인 지도에 관심이 갔어요. 서양에서 세계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이 동아시아 대륙 탐사를 시작한 1500년대부터죠. 이 시기의 지도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를 발로 그린 자취가 담겨 있어요.”

서울 중구 서소문동 명지빌딩 20층에 들어서니 고서가 가득한 문고 한 편에 세계지도들이 보관돼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과학적 천체관측기법을 활용해 서양식으로 동양을 그린 세계지도 1호인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목판본). 1602년 제작된 원본을 1938년 교황청이 상세한 주석을 달아 한정판으로 펴낸 것을 국제 경매에서 어렵게 입수했다고 한다. 세로 4m, 가로 1m의 대형 6폭 병풍을 책으로 제본했다.

유 이사장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1735년 프랑스의 지도제작자 당빌이 그린 ‘조선도’다. 조선 숙종 때 청나라에 제공한 지도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라 영어로 표기한 지명이 중국 발음으로 표기돼 있다. 예를 들어 경기도는 ‘킹키타오(Kingkitao)’로 표기되어 있다. 가만히 보니 한반도의 지형이 뚱뚱한 토끼 모습이다.

“그래도 여기(토끼)까지 온 것은 우리나라가 제법 서양에 알려졌다는 증거죠. 1500년대 지도에는 한반도가 그냥 섬 하나로 동그랗게 그려져 있어요. 그러다 고구마 모양이 되고 서서히 토끼모양으로 변해왔어요. 세계 속의 우리 존재가 얼마나 미미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유 이사장은 7년 전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북한 실측지도를 간신히 구하기도 했다. 잘 알고 지내던 러시아의 한 학자로부터 “구소련 붕괴 이후 소련군 참모본부가 북한의 협력하에 북한 지형을 실측해 5만분의 1로 만든 지도가 일본 고서점을 거쳐 자위대로 넘어갈 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그는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고서점 주인을 설득한 끝에 이 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지도첩은 하천의 너비, 깊이, 유속은 물론 교량의 무게, 수풀의 수종, 굵기, 높이까지 표기되어 있어 북한 땅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 볼 수 있는 지도다.

고지도는 그야말로 골동품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근대 지도제작기법을 개발한 네덜란드 지도가 가장 비싸다. 머캐터, 오텔리우스 등이 만든 것은 수만달러를 호가한다.

유 이사장의 꿈은 수집한 지도들을 보존, 연구, 열람하는 첨단시설과 전문가를 갖춘 지도 박물관을 설립하는 일. 시대별, 제작자별로 세분화해 모으려면 최소한 500점은 있어야 한다.

그는 “근대 세계지도를 놓고 보면 중국과 일본이 주연이고 우리는 조연에 불과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져 서글플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작은 나라가 격변하는 세계사 속에서 5000여년이라는 시간을 버텨 왔다는 사실에 경외감도 든다”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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