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다이아몬드…’ 佛왕정 뒤흔든 목걸이 사기 사건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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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 르브링의 ‘장미를 든 마리 앙투아네트’(왼쪽). 화려한 생활로 인해 자신이 이미 구설수에 올라 있음을 알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600여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오른쪽)를 사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사진제공 책세상
비제 르브링의 ‘장미를 든 마리 앙투아네트’(왼쪽). 화려한 생활로 인해 자신이 이미 구설수에 올라 있음을 알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600여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오른쪽)를 사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사진제공 책세상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주명철 지음/420쪽 1만8000원 책세상

1784년 말 보석상들이 라 모트 백작부인을 찾아왔다. 다이아몬드 600여개를 모아 만든 휘황찬란한 목걸이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팔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머리모양, 옷차림, 보석수집, 노름 등으로 자신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을 알고 있는 왕비는 이 탐스러운 목걸이를 보고도 선뜻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왕비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라 모트 백작부인은 루앙 추기경을 중개자로 내세워 왕비가 그 목걸이를 왕 몰래 사기로 했다며 사기극을 벌였다. 그는 왕비의 서명까지 위조해 그 목걸이를 중간에서 가로챘다.

사기사건은 곧 들통이 났고, 왕은 재판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밝혔다. 루앙 추기경은 파리에서 쫓겨나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라 모트 백작부인은 발가벗겨져 태형과 장형을 받은 뒤 양쪽 어깨에 ‘V’자 낙인이 찍힌 채 평생 감옥에 가둬졌다.

자, 그럼 앙투아네트 왕비의 명예는 회복된 것인가.

이 사건을 곁에서 지켜봤던 한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라 모트 백작부인이 밤중에 베르사유의 숲에서 프랑스 왕비를 가장했다는 데 있다. 왕비가 루앙 추기경을 만나주고, 그에게 말을 걸고, 장미꽃을 주고, 추기경이 자기 발치에 무릎 꿇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꾸몄다는 것이다.…바로 이것이 범죄였다. 종교와 왕의 권위와 도덕을 존중하는 마음이 짓밟힌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는 의뢰인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사건 개요서를 발간해 여론을 선동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약 1년 동안 수많은 사건 개요서가 인쇄되어 팔려나갔고, 신문을 비롯한 각종 인쇄물과 거리의 목소리들이 왕, 왕비, 추기경을 둘러싼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했다. 뒤죽박죽된 이야기들이 만들어 낸 여론이 당장 왕정을 뒤엎지는 못했지만, 왕과 왕비의 신성함에 흠집을 내면서 왕정의 기반을 서서히 무너뜨려갔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앙투아네트 왕비는 체포됐고, 1793년 남편인 루이16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저자(한국교원대 교수·서양사)는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사건을 통해 당시 프랑스에서 ‘여론’이 형성돼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1부에서는 사료들을 치밀하게 재구성해 이 사기사건의 전말을 흥미진진한 실화로 보여 준 뒤, 2부에는 사건 관련 증언기록과 문학작품을 수록해 당시 이 사건을 둘러싼 여론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엿볼 수 있게 했다.

프랑스혁명 전부터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왕비는 결국 ‘프랑스를 말아먹은 죄’로 처형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계집, 오스트리아 암캐, 적자(赤子) 부인 따위의 별명을 얻었고, 수많은 음란한 문학작품에서 공격받았을 뿐 아니라 양성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앙투아네트 왕비의 진실은 어디까지인가. 저자는 혼란스러운 당시의 기록 속에서 다 밝혀낼 수 없었던 사가(史家)로서의 고민까지 독자들에게 그대로 들려준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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