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김경균/‘전통문화 공동체’를 꿈꾸며

  • 입력 2004년 3월 10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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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척박한 우리 디자인 환경에 실망했던 적이 있다. 종이가 문제였다. 그래픽디자인의 결과물은 최종적으로 종이 위에 인쇄로 표현되기 마련인데 당시만 해도 국내엔 종이 종류가 너무나 부족했다. 수백종의 종이를 자유롭게 선택하던 일본의 환경을 그리워하며 종이조차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에서 과연 그래픽디자이너로 살아갈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연히 전통 한지를 취재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우수한 종이인지 조금씩 알게 됐다. 좀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전국의 한지 장인을 찾아다녔다. 대부분 일본식 종이뜨기로 변해버린 가운데 어쩌다 전통 한지 뜨기를 고집스럽게 지켜온 장인을 만나면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한지를 그래픽디자인에 적극 도입해 그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지 궁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전통문화에 빠져들자 한지 이외에 천연염색이나 옹기 등 맥이 끊어지기 직전인 여타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인사동에 가면 ‘전통 제품’이 많지만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대로 만들려면 힘도 몇 배로 들고 그만큼 가격도 비싸지기 때문에 개량이라는 명목으로 편법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지에 펄프를 섞고, 천연염색에 화학 매염제를 사용하고, 기계로 찍어낸 옹기에 광명단을 바른 것들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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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알고부터 대중에게 전통문화를 바로 알리고, 체험토록 할 수 있는 문화운동을 펴나가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지난해 여름 우연히 전통문화체험 공동체 마을을 꿈꾸는 몇 가족을 만났다. 구성원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의 연령층에, 아이들도 또래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살아 온 배경과 하는 일은 다르지만 회색도시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고,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아이들 교육의 미래는 없다는 것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소위 문화예술인을 자처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공동체 마을을 만들어 전통문화를 지켜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전통한지를 떠보고 천연염색도 해볼 수 있는 마을, 전통문화체험마을이 우리의 꿈이다. 우리는 한달에 두 번씩 모여 어떤 체험코스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지 토론한다. 각 가족은 각기 ‘전공’할 전통문화를 배우고 익히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연날리기 팽이치기 등 잊혀져 가는 우리 놀이를 가르치겠다며 이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

현재 우리는 각자 사정에 따라 융자를 받기도 하고 집도 파는 등 우여곡절 끝에 자그마한 땅을 공동구입해 놓았다. 하지만 우리가 산 것은 땅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며 미래였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함께 사는 예행연습을 하며 우리의 삶 속에 문화를 어떻게 디자인해 나갈지 함께 고민할 것이다. 몇 년 뒤 태어날 우리의 마을을 꿈꾸며 때로는 나무그늘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말이다.

김경균 그래픽 디자이너·정보공학연구소장

:약력:

1964년생, 홍익대 시각디자인, 홍익대 대학원, 일본 다마미술대 대학원,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 대통령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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