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무한의 공간' 판화가 에셔, 질서로 세상을 파다

  • 입력 2004년 2월 27일 17시 30분


코멘트
목판화 ‘뱀’(1969년). 일정한 패턴이 크기를 달리하며 반복되는 에셔 특유의 형태미학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목판화 ‘뱀’(1969년). 일정한 패턴이 크기를 달리하며 반복되는 에셔 특유의 형태미학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M. C. 에셔, 무한의 공간/모리츠 에셔 지음 김유경 옮김/173쪽 1만5000원 다빈치

판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우스 에셔(1898∼1972)의 작품들이 컴퓨터 그래픽 시대에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패턴(pattern) 요소의 크기를 줄이거나 늘려나가면서 무한히 반복하는 프랙털(fractal)기법의 그래픽 작품들은 마치 에셔가 이를 예측하기라도 한 듯 그의 판화들과 닮아 있다. 수학자 만델브로트가 ‘프랙털’ 이론을 정립한 것은 에셔 사후 3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에셔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책은 에셔 자신의 편지글과 강연록을 통해 그의 내면세계와 독특한 창작 이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문헌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초현실적이면서 기하학적인 그의 작품들이 단순한 영감의 소산이 아니라 치밀한 이론과 치열한 창작열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한 공개편지에서 그는 ‘단순함과 질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지침’이라고 설파한다. 질서는 단위의 반복이며, 혼돈은 리듬 없는 복제라는 것. ‘반복’과 더불어 그가 ‘대조’에 큰 비중을 두는 것도 역시 한 판화 전문지에 실린 기고문에서 찾아낼 수 있다. ‘스스로 검은 것은 없으며, 스스로 흰 것도 없습니다. 흑과 백은 함께 있음으로써만, 서로를 통해서만 그 자신으로서 현현(顯現)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복 요소들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데 대해 그는 ‘수(數)의 무한성 혹은 총체성을 상징하고자 했다. 각 형상의 크기를 줄여나감으로써 무한히 작은 극한에 도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무한성’과 ‘극한’, 극미(極微)세계에 이르기까지 형상을 반복하는 만델브로트 도형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에서 에셔의 존재는 1999년 번역출간된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를 통해 친숙한 것이 되었다. 이 책에서 호프스태터는 바흐의 대위법적 음악과 에셔의 도형, 논리수학자 괴델의 ‘불확정성 원리’가 갖는 공통점을 짚어낸다. 에셔 역시 바흐의 음악에 대해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힐베르쉼 문화상’ 수상식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50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었습니다. 그 콘서트는 숨이 막히는 듯한 황홀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동일한 형태들로 평면을 규칙적으로 분할하는 저의 작업과, 다성 음악의 캐논 형식의 유사성을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겠지만.”

에셔 자신의 설명을 통해 듣는 논리적 초현실주의적 ‘무한공간’ 여행마저도 다소 난해하다면, 글자에 대해서는 시선을 닫아버려도 좋다. 책에 실린 100여장의 도판을 보며 그가 이끄는 환상여행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