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1904 vs 2004]<1>작가 김연수의 `뤼순 리포트`

  • 입력 2004년 1월 4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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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풍자잡지 ‘도바에’ 1호(1888년)에 실린 ‘낚시’라는 제목의 만평. 작은 나라 조선을 낚아 올리려는 일본과 청, 그 옆에서 틈을 노리는 러시아 등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통렬히 풍자하고 있다. -사진제공 푸른역사
시사풍자잡지 ‘도바에’ 1호(1888년)에 실린 ‘낚시’라는 제목의 만평. 작은 나라 조선을 낚아 올리려는 일본과 청, 그 옆에서 틈을 노리는 러시아 등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통렬히 풍자하고 있다. -사진제공 푸른역사
《1904년 정초 이 땅은 전쟁의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다급해진 조정은 러일전쟁 발발 시 미국공사관으로 피란할 요량으로 뒤늦게 미국공사에게 손을 내밀지만 거절당한다. 궁여지책으로 다시 국외중립을 선언해 보지만 어느 나라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봄이 오기도 전에 제물포엔 포성이 울리고 한양은 일본의 군마에 짓밟힌다. 국망(國亡)의 첫걸음이었다. 100년 전과 지금 안팎의 상황이 꼭 같진 않으나 한반도에 드리워진 위기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재편되고 있는 국제질서에 대한 위정자들의 단견과 이를 둘러싼 소모적인 국론분열로 한 세기 전의 우(愚)를 되풀이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 또한 높다. ‘한반도 1904 vs 2004’ 시리즈는 100년 전이 아니라 오늘에 대한 얘기다.》

뤼순(旅順)은 여전히 먼 도시다. 인천공항에서 다롄(大連)까지 비행기로 1시간, 다롄 중심가에서 뤼순까지는 자동차로 30분. 서울을 떠나 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뤼순은 한국인에게 멀다. 도쿄나 모스크바는 물론이고 뉴욕이나 워싱턴보다 더 먼 곳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의 저편, 이 도시의 이름이 조선사람들의 입에서 공포스럽게 혹은 알 수 없는 기대로 떠올려졌을 때보다 그 거리감은 더하다.

도대체 뤼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물리적 거리의 가까움은 오히려 역설이다. 1904년 초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앞서 두 곳에 함대를 파견했다. 포트 아르투르와 제물포. 그러니까 오늘날의 뤼순과 인천.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 나는 인천공항에서 뤼순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 203고지

중국인들은 뤼순에서 여행을 시작한다고 조선족 가이드가 말한다. 여행(旅)이 순조롭기(順)를 바라는 마음에서란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뤼순 여행은 순조롭지 않다. 군항(軍港)이어서 외국인들은 통행증이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일본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와 관동군사령부 건물 등을 찾을 수 있지만, 가이드는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사진은 찍지 말라고 한다.

이들 건물을 지은 것은 제정 러시아였다. 뤼순은 1898년 산둥(山東)반도를 강점한 독일에 맞서기 위해 제정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조차한 땅. 그러나 러일전쟁은 이 땅의 주인을 다시 일본으로 바꾸었다. 뤼순의 북서쪽 203고지로 향하며 나는 시 한편을 떠올린다.

‘오랜만에 듣는 203고지/ 1만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 오늘 올라보니 감개무량하다/ 하늘을 바라보니 산머리에 흰 구름이 둘러져 있네.’

1904년 9월, 일본군 제3군은 뤼순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203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의 저항 역시 필사적이어서 일본군이 이 고지를 완전히 장악한 것은 그해 12월, 1만8000여명의 희생을 치른 대가였다. 시를 쓴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909년 10월, 만주 시찰에 나섰던 그는 203고지에 올라 이런 시를 남겼다.

18개월에 걸쳐 모두 68만9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공식적으로 얻은 것은 뤼순뿐이었다. 하지만 뤼순을 얻는 자는 한반도를 얻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한반도를 손에 넣기 위해 애써왔던 일본이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토 히로부미가 감개무량해 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 뤼순감옥

여름이면 한국인들로 북적댄다는 뤼순의 일아감옥구지(日俄監獄舊址)로 발걸음을 돌린다. 203고지에서 뤼순감옥까지는 지척이지만 역사적으로는 5년이 더 필요하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은 뤼순감옥으로 압송된다. 재판에서 안중근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의 거사는 나 일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宣戰詔勅)에 의하면, 러일전쟁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을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감방으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안중근이 마지막 봄 햇살을 맞으며 써내려간 ‘동양평화론’의 내용도 그의 진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일본군이 203고지에 세워놓은 포탄탑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위해 1만8000명의 젊은이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한다. 여섯 발의 총알만으로는 역사의 물줄기를 돌릴 수 없었다.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처형된 바로 그해(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됐다.

# 다롄의 푯말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노라면 중국인들에게서 다롄에 꼭 가보라는 얘기를 듣는다. 중국인들의 자부심에 가득 찬 목소리 그대로 다롄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현대도시다. 노동공원 옆에 있는 텔레비전탑에 올라가면 뤼순이 속한 다롄시 전역이 눈에 들어온다. 가이드는 각종 쇼핑몰과 특급호텔, 축구팀 다롄 스더(實德)의 홈그라운드 등을 설명하느라 분주하지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동서남북 주요 도시와의 거리를 밝혀놓은 푯말이다.

하얼빈, 블라디보스토크, 평양, 서울, 도쿄, 베이징, 칭다오, 상하이. 모두 다롄에서 직선거리 1000km 안쪽에 있다. 다롄은 동북아의 한쪽 축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 축의 움직임은 한반도와 지린 헤이룽장 랴오닝 등 동북 3성, 더 정확하게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만선(滿鮮)’의 운명에 절대적이다.

한 달 동안 동북 3성을 여행하면서 나는 이 축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을 체감했다. 다롄의 2001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700달러이고 2010년의 예상소득은 7000달러. 텔레비전탑에서 다롄 중심가의 빌딩군을 바라보면서 지금보다 세 배로 경제가 성장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됐을 때의 한반도 운명이다.

# 그리고 한반도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국에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중국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들은 10년 뒤 자신의 재산이 세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게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옌지에서 만난 한 조선족은 언젠가 북조선 친척이 와서 3000위안만 주면 평생 살 수 있으니 마련해 달라고 해서 애먹었다는 얘기를 서울 억양으로 전한다. 3000위안이면 우리 돈 45만원 정도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 정부는 6자회담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한반도 통일 이후의 국경선 획정 문제에 대비하는 동북공정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북한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긴장관계를 고려할 때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필연적으로 러시아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다. 이는 다시 미국과 일본의 힘 역시 그만큼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요컨대 100년 전처럼 한반도의 운명을 둘러싼 위험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뤼순의 운명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수밖에 없었던 안중근이 결국 뤼순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역사란 철저하게 인과관계로 진행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과연 10년 뒤를 어떻게 상상해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를 둘러싼 세력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다시 100년 전처럼 무기력하게 평화를 호소해야 할 것인가. 10년 뒤를 상상하려면 현재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놓인 ‘다롄일보’ 1면은 중국공산당이 개최한 마오쩌둥 탄생 110주년 기념 좌담회 소식으로 꽉 차있다. 최근 중국은 마오쩌둥 열기 속에 빠져 있다. 그 핵심은 마오쩌둥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실현했다는 것. 그들의 ‘부흥’은 우리를 포함해 동북아에 어떤 소용돌이를 몰고 올 것인가. 100년 전 뤼순의 교훈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한 한국인에게 뤼순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쓰며 생의 마지막 날을 보낸 뤼순감옥 앞에서의 필자. -사진제공 김연수씨

▼김연수 작가 약력▼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2001년 장편 ‘달빠이 이상’으로

동서문학상 수상

△2003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동인문학상 수상

△2003년 11∼12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취재 위해 중국 여행

△소설집 ‘스무살’, 중편 ‘사랑이라니 선영아’,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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