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노벨상의 저울…1895년 노벨,유언장 작성

  • 입력 2003년 11월 26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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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을 헤아리는 노벨상의 역사는 고귀한 명예와 빛나는 영광의 순간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수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공정성 시비에 휘말려 왔다.

평화상은 물론 20세기 과학의 지표 역할을 해온 과학 분야마저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자국어 이외의 언어에 대한 무지(無知)를 드러내고 있다는 혹독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노벨위원회의 게이어 룬데슈타트는 “아마도 가장 큰 잘못은 마하트마 간디에게 상이 수여되지 못한 것이며, 하마터면 아인슈타인이 상을 받지 못할 뻔한 것”이라고 말했다.

1918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화학상을 수상하자 국제사회는 경악했다. 하버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독가스를 제조했던 장본인. 그는 독가스 개발에 반대하는 부인과 이혼할 정도로 독일제국의 전쟁에 광신적이었다.

1970년대 들어 노벨평화상은 비난을 넘어서 냉소를 받기에 이른다.

1973년 미국의 헨리 키신저와 공동 선정된 베트남의 레 둑 토가 상을 거부한 데 이어 그 다음해에는 사토 에이사쿠 당시 일본 총리에게 상이 돌아갔다. 사토는 일본의 비핵 평화정책을 “난센스”라고 비웃었으며 부패혐의까지 받은 정치인이었다.

노벨위원회는 데탕트에 뒤이은 국제사회의 ‘새로운 거래’에 과도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노벨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비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다. 동시대인들에게 자유주의자, 심지어 사회주의자로까지 비쳤으나 그 자신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노벨위원회는 수상 논란에 대해 “여러 해 동안 과오가 저질러진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라며 “진짜 놀라운 일은 과오가 극히 드물게 저질러졌다는 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마도 노벨상 운영이나 노벨의 생애에 대해 그 이상의 적절한 평가는 없을 것 같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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