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위대한 유산'…백수여! 인생로또 꿈꾸시나

  • 입력 2003년 11월 6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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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의 주인공들은 취업난에 희생된 고달픈 백수라기보다 자발적 백수로,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부모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인생의 유예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들은 취업난에 희생된 고달픈 백수라기보다 자발적 백수로,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부모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인생의 유예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현재 상영중인 영화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은 소위 ‘백수’인 두 남녀다. 특이한 것은 주인공 창식(임창정)과 미영(김선아) 둘 다 취업난에 희생된 ‘백수’라기보다 어느 정도 자발적 실업자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창식은 학벌이 꽤 괜찮은데도 취직을 하기 위해 별반 노력을 하지 않는다. 크게 내키는 조건은 아니지만, 형수이자 친구가 하는 학원에서 강사로 일할 수 있는 ‘옵션’이 있는데도 그는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창식은 일종의 사회심리적 유예기간, 즉 ‘모라토리엄’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를 보며 생각하게 된 것은 ‘과연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가장 적절한 시기란 언제인가’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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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문제는 정답이 있을 리 없고, 어쩌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회나 관습이 요구하는 기대치라는 게 있다. 이 영화에서 창식과 미영이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것은 단지 ‘밥값’을 못해서일 뿐 아니라, 그들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타이밍이 사회가 요구하는 평균적인 시점보다 한참 늦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내가 누구이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청소년기에 설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라토리엄이란 ‘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에 여러 가능성을 탐색하고 준비하는 기간이며, 그동안에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서 면제를 받는다.

요즘 한국에서는 모라토리엄이 삶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아 가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별다른 목적의식 없이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여러 종류의 대학원을 잇달아 다니고, 그러면서도 언제까지나 사회에 나갈 준비가 덜 되었다고 믿는 것이 그 한 예다. 정해진 직업 없이 지내며 특별한 취미에 몰두하거나 사이버 세계 등에 탐닉하는 라이프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유산’을 보며 웃던 와중에도 마음에 걸렸던 대목은, 두 주인공이 자꾸만 청소년기에나 가졌음직한 판타지의 세계로 퇴행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진짜 부모’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든가, 어쩌다 마주친 기회로 일확천금을 꿈꾼다든가 하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스토리는 청소년기에 흔히 갖는 백일몽을 연상케 한다.

이렇듯 주인공들이 유예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상태를 즐기지도, 이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혹시 청소년기에 해야 하는 일들을 아직 남겨 두고 있어서는 아닐까.

에릭슨이 말하는, 청소년기가 끝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갈 길에 대해 답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탐색과 고민은 청소년기의 특권이다. 그러나 입시준비가 인생의 전부인 요즘의 청소년들에게는 그 기회가 너무 적고 또 박탈되고 있다. 그러니 성인기 이후에 오랜 유예기간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갈 길을 너무 일찍 결정해 버리는 반대쪽의 극단에도 문제는 있다. 대개의 의대 출신들이 그러하듯 나도 20대 초반에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일찌감치 결정해 버렸고, 지금은 확고한 외적 정체성을 지닌 양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앞으로 이럴까 저럴까가 늘 헷갈리고, 정작 중요한 일은 잘 결정하지도 못하며, 영화니 만화니 야구니 록 밴드의 공연이니 온갖 취미를 좇아 방황한다. 아직도 “이젠 세월이 흘러…저도 어른이잖아요” 하는 가사에 기꺼이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유예기는 아니더라도 삶의 한 부분을 모라토리엄의 공간으로 남겨 두고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원인이 혹시 별 고민 없이 그저 ‘말 잘 듣는 아이’였던 청소년기와 지독한 모범생이었던 20대 시절을 보낸 데 있는 것이 아닐지, 요즘 좀 심각하게 생각중이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 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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