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 가을축제 ‘그들만의 잔치’

  • 입력 2003년 10월 13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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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한 동네에 살았지만 축제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한창 일해야 하는 평일 낮 시간에 축제를 하면 누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부산 금정구 주민 박모씨(35·상업)는 3일부터 12일까지 열린 제8회 금정예술제를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금정구가 7000여만원의 예산을 들인 이 축제에 20여개의 행사가 열렸지만 행사장마다 초청된 공연팀과 행사 관계자, 동원된 주민들로 자리가 채워졌다. 축제를 즐기려고 나온 주민들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10월 들어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거나 예산을 지원하는 각종 축제가 봇물터지 듯 쏟아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축제가 주민 참여가 저조한 관(官) 주도여서 예산을 쏟아 붓는 ‘낭비 행사’가 되고 있다.

또 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비슷한 소재로 축제를 벌이거나 상업성을 지나치게 내세워 참가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는 일이 적지 않다.

1일 대전 서구 둔산동 대전시청 남문 광장에서 열린 ‘시민의 날’ 기념식. 이날 행사는 서울에서 윤도현밴드 등 유명 가수 10여개 팀을 출연시키고 무대를 장식하는 비용만 1억원 이상이 들어 “일회성 행사치고는 지나친 낭비”라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행사가 유명 가수들의 텔레비전 녹화 중심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20, 30분씩 지연되기도 해 참가한 시민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충남 홍성군과 태안군은 매년 10월 거의 동시에 ‘대하(왕새우)’축제를 열며 서로 원조다툼까지 벌이고 있다. 때로는 두 군이 벌이는 대하축제의 시기가 겹치기도 한다. 경남 창원시 함안군 의령군은 매년 수박축제를 연다. 제주에서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자리돔, 한치 축제는 내용이 비슷해 동네 사람들의 잔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근 충남 서해안에서 열린 특산물 축제에 다녀온 김모씨(35·대전 서구 둔산동)는 “생선 가격도 대도시보다 비싸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면서 “다시는 지방의 특산물 축제를 찾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20개 시군이 한 해에 100여개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 경남도는 ‘시군 축제 통폐합’이란 칼을 빼들었다.

산청군과 합천군은 비슷한 시기에 많은 예산을 들여 철쭉제를 개최하면서 통합여론을 외면해 오다 올해 경남도로부터 윤번제 개최 권고를 받았다. 경남도는 올 2월 중복되는 시군 축제의 통합을 권유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행사비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경남도 유혜숙(劉惠淑) 문화관광국장은 “외부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지역 주민들만의 잔치에 그치는 축제가 상당수”라고 지적했다.

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일부 행사가 단체장 얼굴 알리기용으로 전락한 것도 큰 문제다.

대전 모 구청은 내년 총선에 출마할 것이 확실시되는 구청장의 인물 사진이 들어간 축제 안내문 4만장을 만들어 배포했다. 이 구청장은 안내문에서 △행사 개최에 따른 지역경제 파급 효과 △(행사가) 대외기관으로부터 수상한 명세 등 치적 알리기에 주력했다.

시민 임모씨(41·여·대전)는 “축제에 가면 자치단체장, 지역 국회의원, 의회 의장 등 5, 6명이 앞 다퉈 인사말을 하기 때문에 유세장인지 축제장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 말했다.

배재대 정강환 관광이벤트연구소장은 “자치단체 행사가 노래자랑, 아가씨선발대회 등 천편일률적인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며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축제가 차별성을 띨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전=이기진기자 doyoce@donga.com

창원=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부산=석동빈기자 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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