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신무협지는 중산층 삶에 대한 야유”

  • 입력 2003년 10월 13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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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준 서울대 중문과 교수는 최근 1년간 1961년 이래 발간된 우리나라 무협지들을 다시 독파하느라 애썼다. 자신이 서울대 한국학 연구사업 과제로 제출한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를 집필하기 위해서였다.

서울대는 13일 전 교수의 ‘무협소설의…’ 등을 포함해 2001년 시작한 한국학 연구시리즈 첫 결과물 12권을 내놓았다. 시리즈 발간을 주관한 연구사업지원실은 당초 60여편의 연구주제를 신청받아 기초자료가 충실하고 연구의 지평을 문학 역사학 바깥까지 넓힌 12건을 선정했다. 연구사업운영위원장인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지 않고 과거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지는지도 중시했다”고 밝혔다.

시리즈 중 ‘무협소설의…’는 정통 문학 비평가들의 관심 밖에 있는 무협소설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점이 우선 주목을 끌었다. 전 교수는 1994년 이후 부흥기를 맞은 국내 창작 무협소설을 이른바 ‘신무협’이라고 규정하며 이전 무협소설과의 차이를 밝혔다.

70, 80년대 무협소설은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고 기성질서에 편안히 적응하는 성공담이 주를 이뤘다. 이는 저소득층 독자들에게 ‘너의 현재의 곤경은 중산층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라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신무협 소설에서 대다수 주인공들은 처음에도 소외된 하층민이었고 일련의 고난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승리한 뒤에도 여전히 하층민으로 남는다. 전 교수는 “기존의 무협소설이 기성질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중산층적 삶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했는데 반해 신무협은 오히려 중산층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야유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신분상승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각성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와 한영우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한국사) 등 전공 분야가 다른 6명이 집필한 ‘살인의 진화심리학’은 학제적 접근을 통해 조선후기의 살인사건을 진화심리학적 이론으로 분석한 연구서다.

연구자들이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인 ‘규장각한국본종합목록(奎章閣韓國本綜合目錄)’에 기재된 463건의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이 중 80%가 남성간 살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살인의 원인을 종족 번식의 본능에서 찾는 진화심리학적 해석과 일치한다. 당시 남성들에게는 젊은 시절의 평판이 아내를 얻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공개적으로 모욕당했을 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 아내를 못 얻기 때문에 갈등의 수위가 고조돼 살인으로 치달았다는 것.

이 밖에 ‘현대 한국유교와 전통’ ‘정조시대의 무예’ ‘벼락도끼와 돌도끼’ ‘한국 옛 경관 속의 생태지혜’ ‘식민권력과 통계’ ‘한국의 천연염료’ ‘북한의 의학교육’ 등이 함께 출간됐다.


13일 열린 서울대 한국학연구시리즈 서평 출판기념회. 왼쪽부터 김호 국사학과 강사, 황희선 생명과학부 석사과정생, 이선복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나영일 체육교육과 교수, 정운찬 총장, 김영식 동양사학과 교수, 전형준 중문과 교수, 박명규 사회학과 교수, 서호철 사회학 박사. -김미옥기자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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