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선물 받는 집만 받아요” 백화점 택배 풍속도

  • 입력 2003년 9월 5일 18시 29분


코멘트
“또 갈비인가요? 상품권으로 바꿔도 되죠?”(서울 서초구 서초동 주부)

“남편이 선물은 일절 받지 말라고 했어요.”(서울 강남구 대치동 주부)

4일 오전 서울 한 백화점의 ‘주소 확인팀’ 직원 8명은 수화기에 매달려 선물 받을 고객의 주소 확인에 여념이 없었다.

몇 년째 이곳에서 일해 온 이들은 경기침체와 윤리경영 확산 등으로 올 추석 선물 풍속도가 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전체적으로 선물 단가가 지난해보다 다소 낮아진 점.

실제 이 백화점의 경우 전체 선물 중 5만∼10만원인 중저가 선물의 비중이 지난해 25% 선에서 30% 이상으로 늘어났다. 한 직원은 “올 추석장의 대세는 실속선물”이라고 말했다.

또 선물 보내는 쪽의 ‘상품권 선호’ 현상이 한풀 꺾인 것도 두드러진 변화.

이 백화점의 추석 매출에서 상품권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1년 72.6%, 2002년 73.4%로 계속 높아져 왔다. 그러나 올해 목표는 67% 수준.

한 직원은 “상품권을 선물하려면 적어도 10만원권 이상이 들어 부담스러워서인지 예산도 절약하고, ‘정’도 담을 수 있는 선물세트로 수요가 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받은 선물을 상품권으로 바꿔 달라는 신청도 많이 접수돼 선물을 받는 입장에서는 여전히 상품권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원들은 또 선물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 둘 곳이 없다며 추석 후까지 보관해 줄 것을 부탁하거나, 여러 장의 상품권을 들고 와 고가상품을 사가려는 고객들이 늘어났다는 것.

직원들은 “원래 선물은 많이 받는 집으로 더욱 몰리는 경향이 있는데 올해는 이 현상이 더 심하다”며 “올해는 경기가 좋지 않아 꼭 ‘필요한 집’에만 보내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풀이했다.

최근 몇년간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증가하는 것도 관심을 끄는 추세다. 주소확인 전화를 받은 한 고객은 “5만원대 이상의 선물은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직원 지모씨(26·여)는 “올해는 일반 회사원 중에도 선물을 안 받겠다는 경우가 전화 100건당 1, 2건씩 나온다”고 말했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김란도(金蘭都) 교수는 “추석선물이 대가성을 띨 수 있기 때문에 기업에서도 글로벌 경쟁과 합리적 경영을 위해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본보 기자 배달 체험기▼

4일 오전 7시 서울의 한 백화점 물류센터.

성수기를 맞아 평소보다 2시간이나 일찍 문을 연 이곳은 인부들이 창고에 쌓인 물품들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날 센터에서 배달해야 하는 물품은 4000여건. 평소보다 10여배 늘어난 물량이다.

센터 한쪽에 위치한 사무실에는 ‘선물배달 도우미’를 하겠다고 나선 아르바이트생들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 침체 탓인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부, 50대 남자들도 많았다.

기자도 아르바이트생을 자청해 직접 배송 현장으로 따라나섰다.

이날 맡은 구역은 서울 서초구 일대.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인 만큼 물품도 고가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갈치 옥돔 등 5만∼10만원대의 선물세트가 주류를 이뤘다.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경. 기자는 약 10만원짜리 굴비세트 하나를 들고 서초구 양재동의 한 빌라를 찾아갔다.

“이런 것 받아도 되나….”

현관에 나온 주부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최근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몸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주부는 “누가 보냈느냐” “내용물이 뭐냐”고 일일이 물어보고 나서야 수취 서명을 했다.

이날 함께 일했던 택배원은 “요즘엔 하루에 한두 건씩 꼭 수취 거부가 생긴다”고 말했다.

55개에 이르는 선물세트를 모두 배달하고 센터로 돌아온 시각이 오후 7시경.

물류센터 관계자는 “엄청나게 많긴 하지만 물량이 작년에 비해 10∼20%는 줄어든 것 같다.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