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초대 대표 김승훈신부 선종

  • 입력 2003년 9월 2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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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광주의거 7주기 추도미사’가 열린 뒤 등단한 김승훈 신부는 차분한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습니다.”

구속된 경관 2명 외에 직접 고문을 자행한 진범 3명과 이를 은폐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간부 4명의 명단도 폭로했다. 이 폭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고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김승훈 신부가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범이 조작됐다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일 선종(善終)한 김 신부는 70, 8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의 대부 역할을 했다. 그에게는 ‘사회정의와 민주화운동의 선각자’ ‘거물급 재야인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김 신부는 74년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그 대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제서품 연도가 가장 앞선다는 이유로 사제단 대표가 됐다고 그는 겸손해했지만 솔선수범하는 성품으로 봐서도 적임자였다. 그는 76년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씨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한 ‘명동사건’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가 77년부터 주임신부로 재직한 서울 동대문성당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김지하 시인의 ‘문학의 밤’도 개최됐다.

80년대 통일 노동운동을 한 그는 89년 방북한 임수경씨의 귀국을 돕기 위해 북한으로 가겠다고 고집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문규현 신부에게 양보했다.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박노해 단병호씨를 비롯한 양심수 석방에도 노력하는 등 인권과 자유를 위한 곳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스스로 원해서 나선 게 아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 세상은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우리가 그 속 깊숙이 들어가 변화시켜 나가야 할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주위사람들은 “김 신부는 말이 없어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내는 부드러웠다”고 한다. 99년 회갑을 맞아 펴낸 회고록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빛두레)에선 “별 것도 아닌 사람이 책을 냈다”며 부끄러워했다.

김 신부와 인생행로를 같이했던 함세웅 신부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늘 ‘괜찮아, 하느님께서 다 해주실텐데’라고 말하는 낙천주의자였다”며 “천주교의 바위 같은 분”이라고 회고했다.

김 신부는 말년에 간암으로 고생하면서도 새만금 삼보일배 현장을 찾아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을 격려하는 등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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