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습니다.”
구속된 경관 2명 외에 직접 고문을 자행한 진범 3명과 이를 은폐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간부 4명의 명단도 폭로했다. 이 폭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고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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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선종(善終)한 김 신부는 70, 8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의 대부 역할을 했다. 그에게는 ‘사회정의와 민주화운동의 선각자’ ‘거물급 재야인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김 신부는 74년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그 대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제서품 연도가 가장 앞선다는 이유로 사제단 대표가 됐다고 그는 겸손해했지만 솔선수범하는 성품으로 봐서도 적임자였다. 그는 76년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씨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한 ‘명동사건’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가 77년부터 주임신부로 재직한 서울 동대문성당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김지하 시인의 ‘문학의 밤’도 개최됐다.
80년대 통일 노동운동을 한 그는 89년 방북한 임수경씨의 귀국을 돕기 위해 북한으로 가겠다고 고집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문규현 신부에게 양보했다.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박노해 단병호씨를 비롯한 양심수 석방에도 노력하는 등 인권과 자유를 위한 곳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스스로 원해서 나선 게 아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 세상은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우리가 그 속 깊숙이 들어가 변화시켜 나가야 할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주위사람들은 “김 신부는 말이 없어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내는 부드러웠다”고 한다. 99년 회갑을 맞아 펴낸 회고록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빛두레)에선 “별 것도 아닌 사람이 책을 냈다”며 부끄러워했다.
김 신부와 인생행로를 같이했던 함세웅 신부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늘 ‘괜찮아, 하느님께서 다 해주실텐데’라고 말하는 낙천주의자였다”며 “천주교의 바위 같은 분”이라고 회고했다.
김 신부는 말년에 간암으로 고생하면서도 새만금 삼보일배 현장을 찾아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을 격려하는 등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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