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화성-개구리소년 사건 흔적은 널려 있었다

  • 입력 2003년 5월 15일 16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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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사건과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미제(未濟) 살인 사건이다. 사건 발생 10년이 넘었는데도 수사본부가 존속돼 살인범을 쫓고 있는 경우는 이 두 사건 뿐이다.

화성 연쇄살인은 1986∼91년 경기 화성군(지금의 화성시)에서 모두 10명의 여성이 살해된 사건. 개구리소년 사건은 1991년 3월 개구리를 잡으러 산에 올라갔다 실종된 다섯 어린이의 유골이 지난해 9월 대구 와룡산에서 발견된 것이다.

두 사건 수사에 연인원 60만명이 넘는 경찰 및 군 병력이 투입됐다. 개구리 소년 사건의 수사기간은 12년 1개월, 화성사건은 16년 8개월.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화성 살인사건 중 범인을 잡은 것은 88년 9월에 일어났던 8차 사건뿐이다.

미제로 남은 9건의 화성 연쇄살인 가운데 6건은 이미 공소시효(살인 15년)가 끝났다. 이제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 있는 사건은 3건 뿐. 그나마 이 3건의 공소시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왜 두 사건은 미궁에 빠진 것일까. ‘살인의 추억’속으로 들어가 보자.

● 살인과 ‘소문들’

회가 거듭될수록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완벽한 살인범’ 혹은 ‘고도의 지능범’으로 포장돼 알려졌다. 일단의 사실과 부정확한 소문이 뒤엉켜 이런 범인의 모습을 빚어냈다.

우선 범인이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소문. 범인은 따로 흉기를 준비하지 않고 숨진 여자들의 소지품과 옷을 살해도구로 이용했다, 지문이나 머리카락도 없었고 강간을 하면 현장에 남기 마련이라는 음모(陰毛)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엽기적인 살해방식도 소문을 증폭시켰다. 범인은 주로 젊은 여자를 강제추행한 뒤 살해했다. 피해자의 머리에 속옷이 씌워져 있기도 했고 음부에서 복숭아 조각, 포크, 숟가락 등이 나오는 끔찍한 장면도 있었다.

‘화성 괴담’도 돌았다. 이 사건에 어떤 식으로건 간여했던 사람들이 불행해졌다는 것. 9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3차례 경찰조사를 받았던 차모씨(38)가 90년 3월 화성군 태안읍 병점역 철길에서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91년 4월에는 10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의 추적을 받던 장모씨(32)가 아파트 4층 옥상에서 투신해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90년 9차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붙잡혀 경찰에서 자백까지 했다가 현장검증 도중 범행을 부인했던 19세의 윤모군. 유전자 감식 결과 연쇄살인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져 풀려났지만 97년 암으로 요절했다. 게다가 유일하게 범인을 잡은 8차 사건에서 범인 추적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최모 순경은 99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화성, 진실과 허구 사이

그러나 살인의 진실은 떠도는 이야기들과 거리가 있다. 우선 비 오는 날에만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문. 10건의 살인 중 절반인 5건이 맑은 날에 일어났다. 피해자가 모두 젊은 여성인 것도 아니다. 1차와 10차 사건의 피해자는 나이가 71세와 69세였고 7차 사건 피해자는 52세였다. 피해자의 음부를 크게 훼손한 ‘엽기적인 범행’은 4, 6, 7, 9차 사건 네 차례였다.

무엇보다 범인의 ‘뒤처리’가 완벽하지 않았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한 경찰관은 “현장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흔적이 상당히 많았다”고 말했다.

2차 사건 현장에서는 정액과 담배꽁초, 6가닥의 머리카락이 발견됐고 3차 때도 머리카락과 정액이 나왔다. 4차 현장에서는 발자국과 정액이 묻은 손수건, 5차 때는 피해자의 음부 안에서 정액이 검출됐다. 6차 때는 용의자의 것으로 보이는 정액이 묻은 잠바, 7차 때는 음모와 정액, 9차 때는 머리카락과 정액, 10차 때에도 정액이 나왔다. 피해자의 소지품만을 살해 도구로 삼았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1차 사건 때 범인은 장갑 낀 손으로 피해자의 목을 졸랐고 2차 때는 드라이버로 추정되는 흉기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런 흔적들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왜 범인을 잡지 못했을까. 1987년 화성경찰서 수사계에 근무하며 이 사건을 맡았던 화성경찰서 방종찬 강력계장의 설명.

“범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굳이 꼽자면 화성 지리를 잘 알아 으슥한 곳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정도다. 문제는 살해동기를 전혀 발견할 수 없어 수사망을 좁힐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화성에는 공장이 많아 수원 등에서 오가는 하루 유동인구가 7000명이 넘었다. 용의자를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다. 게다가 희생자 시체가 늦게 발견돼 현장 주변 흔적들에 남았을 사건해결의 단서가 사라졌다.”

아홉 차례의 살인 중 범행 24시간 안에 시신이 발견된 것은 5, 7, 9, 10차 네 차례뿐이다. 이마저 모두 범행 뒤 하룻밤을 넘긴 다음날 발견됐다. 지문이나 담배꽁초에 묻은 침 등은 하룻밤 이슬만 맞아도 대개 사라진다.

당시 과학수사의 수준이 낮았던 점도 범인에게는 운으로 작용했다. 사건 초기에는 남은 머리카락과 정액 등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범인의 혈액형 정도였다. 8차 사건 이후 유전자 감식기법이 도입됐지만 이 마저 유전자 감식을 일본에 의뢰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현장의 흔적에서 감식해낸 범인의 혈액형은 A, B, AB형 등 세 종류. 이 때문에 경찰은 9건 모두를 한 명이 꾸민 치밀한 살인극이라고 보지 않는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한 경찰관은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한 사람이 꾸민 범죄라면 그는 정말 치밀하고 영리하며 지독한 살인범일 것이다. 어떨 때는 일부러 A형 감식이 나오는 머리카락을 흘리고, 어떨 때는 B형 감식이 나오는 정액을 남기고, 또 어떨 때는 AB형 감식이 나오는 음모를 흘렸다는 이야기니까. 그게 가능할까? 현장에 담배꽁초와 발자국을 여기저기 남긴 범인이 정말 그렇게 치밀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두개골에 남은 10여개의 상처

8일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 수사본부는 “소년들을 살해하는데 사용된 타살 도구가 뭔지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고 밝혔다. 진범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실낱같던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2002년 9월 소년들이 발견된 후 경찰이 단서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남은 것’은 다섯 소년의 유골뿐이었다. 인류학, 법의학, 지질학, 곤충학 전문가들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타살’이라는 결론을 냈을 뿐 주요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가장 큰 의문점은 한 소년의 두개골에서 발견된 10여개의 상처. 주변 사람들은 이 소년이 평소 실종 소년들의 리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리더’의 머리 옆면 귀 주변에 각각 ㄷ자 모양을 한 10여개의 작은 상처가 나 있다. 상처는 일정한 방향으로, 누군가 작심한 듯 콕콕 규칙적으로 찌른 듯한 모양.

지난해 11월 유골을 감정한 경북대 법의학팀은 이 상처를 개구리소년들이 타살된 결정적인 증거로 여겼다. 바위에 긁혔거나 짐승 발톱에 찍힌 자국으로 보기에는 그 모양이 너무 규칙적이었기 때문.

그러나 문제는 경북대 법의학팀이 분석을 의뢰한 미국 법의학 전문가들이 이 상처를 소년이 살아있을 때 생긴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를 예리한 흉기로 찌르면 찔린 사람은 머리를 움직이는 등 반응을 하기 때문에 상처가 일정할 수 없다. 그러나 범인은 어떤 방법을 썼는지 ‘살아있는’ 소년의 머리에 규칙적인 상처를 10여곳이나 냈다.

또 다른 의문점은 왜 10년 전 수색 때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느냐는 것. 91년 3월26일 소년들 실종 후 경찰은 연인원 30만명의 경찰력과 군 병력을 동원해 와룡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수색조들이 양팔 간격으로 벌려 일렬로 선 채 산 전체를 물 샐 틈 없이 뒤졌다’는 것.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범인이 소년들을 다른 곳에서 살해한 뒤 나중에 와룡산에 묻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지질학자와 곤충학자들은 “토양 분석 결과 다섯 소년은 유골이 발견된 그 자리에서 숨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의문은 흉기. 둔탁하고 무거운 둔기라면 그 종류를 추정하기 어렵지만 ㄷ자 모양의 상처를 낸 예리한 흉기라면 대개 추정이 가능하다.

수사반은 산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들, 즉 나물 캐는 사람, 밀렵꾼, 군인(다섯 소년이 발견된 장소 근처에 군부대가 있었음), 낚시꾼 등이 평소 사용하는 각종 도구를 모두 조사했다. 산과 관련이 없더라도 뾰족하기만 하면 모두 점검 대상이었다. 바느질할 때 사용하는 작은 쪽가위까지 흉기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끝내 유골에 난 상처와 일치하는 흉기를 찾지 못했다.

●“범인은 운이 좋았을 뿐”

범인은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고도 단서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사를 맡은 경찰관들은 이 수많은 미스터리가 ‘범인의 치밀함’에서 나온 결과라기보다 ‘범인의 운’ 덕분이라고 단언했다. 소년들을 죽인 동기를 발견할 수 없고 유골이 11년이 지난 상태에서 발견된 탓에 수사가 어려울 뿐 이라는 것.

만약 당시에 유골이 아닌 시체가 발견됐다면, 즉 뼈가 아닌 피부에 난 상처 모양이 남아있다면 보다 정확하게 흉기 종류를 추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 법의학자들의 얘기다.

지난해 유골 발견 당시 대구시 경찰청 과학수사계장으로 감식에 참여했던 대구 동부경찰서 최용석 청문감사관은 “산악 수색은 원래 완벽하게 이뤄지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이 잡듯 뒤졌다’는 것은 당시 기분일 뿐, 산악수색은 대부분 등산로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은 지금은 등산로에 가깝지만 당시에는 등산로와 멀었다.

경찰은 범인을 최소한 3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산길에 익숙한 날랜 소년 다섯 명을 한꺼번에 붙잡으려면 어른이라도 한 명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유다.

수사본부 책임자인 대구 달서경찰서 홍영규 형사과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범인들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11년 넘게 철저히 단결해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 정도다. 보통 집단적으로 이뤄진 살인 사건에서는 주범(主犯)이 아닌 종범(從犯)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자수하거나 주위 사람에게 범행을 발설하는 일이 많다.”

홍 과장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11년 전에 시신을 발견했다면? 나는 99% 범인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구·화성=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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