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청년 서세옥 화백 "관조의 눈, 그것이 예술"

  • 입력 2003년 2월 25일 1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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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화단의 산 증인이며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산정 서세옥이 그의 서울 성북동 집앞에 섰다. 그의 멋스러움과 품격이 한옥과 잘 어울린다. 그는 일흔 넷이라는 나이는 그저 인간이 만든 시간일 뿐이라고 말했다. 권주훈기자
현대 한국 화단의 산 증인이며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산정 서세옥이 그의 서울 성북동 집앞에 섰다. 그의 멋스러움과 품격이 한옥과 잘 어울린다. 그는 일흔 넷이라는 나이는 그저 인간이 만든 시간일 뿐이라고 말했다. 권주훈기자

도쿄 개인전(3월6일∼26일) 시작 전에 뵈었으면 한다 했더니, ‘작품 준비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다. 겨우 월요일 오후로 시간을 잡았다. 오전에 뵈었으면 했는데 ‘나도 준비는 하고 있어야지’ 했다. 성북동 집에 도착해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추장스럽다 하더니 일단 맘을 먹었는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이번 컷은 나도 감이 왔어’했다. 산정 서세옥(山丁 徐世鈺·74) 화백은 그랬다. 벗어나 있는 듯하면 몰입해 있었고 몰입해 있는 듯하면 벗어나 있었다.

“나는 ‘비켜가기’라고 말하지. 장마비에 휩쓸려 떠내려 가면서도 강물 위를 바라보는 관조의 눈을 함께 가지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 예술의 전부야.”

그랬다. 그는 배우이자 관객이었고 감독이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모습에 기자는 휘둘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겸손했지만 오만했고 따뜻했지만 찼다. 가벼운 듯하면서 무거웠고 무거운 듯하면서 가벼웠다. 거기다 잘 웃었고 잘 토라졌다. 맑고 주름없는 얼굴과 군살없는 체격. 검은색 스웨터에 회색 바지, 검정색 가죽신발, 동그란 안경테…. 이 모든 소품들에서는 멋스러움과 품격이 우러났지만 그 속엔 ‘아무나 내 영역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강한 에고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가 만드는 그런 모습은 서울대 미대 학장과 미술협회회장을 지내며 후학들을 이끌고 미술계를 지배해온 한국 화단의 산증인이라는 ‘겉’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속, 내면 때문이었다. 그는 ‘나이 일흔 넷은 너희들이 만든 시간일 뿐’이라며 조롱하고 있었다. 그는 늙었지만 젊었다.

그림과 함께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인 전각(篆刻)하는 방으로 안내됐다. 그는 지금까지 수백여편의 한시를 지어 붓으로 쓰기도 했고 전각하기도 했다. 시 한편을 골라 뜻을 새겨 주었다.

도쿄 개인전에 선보일 ‘춤추는 사람들’(2003).

‘吾道孤行, 但珍重自愛 以待傾倒之知者’ (외롭게 가는 나의 길, 다만 소중하게 스스로를 사랑하여 꺼뻑 엎어지면서 알아주는 이를 기다리노라).

흘깃 그의 표정에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를 두고 ‘사실주의적 한국화에서 출발해 가장 완벽하게 절제된 현대 한국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노대가’ 라는 평단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어쩌면 이 말들에 감춰진 엄청난 자기 부정과 혁명의 외로웠던 시절을 지금 회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기자는 생각했다.

작업실에 들어섰다. 초등학생 키만한 붓자루들이 여기저기 꽂혀 있었다. 무거웠다. 물을 적시면 더 무거울텐데. 속옷 하나만 걸치고 작업실을 휘젓고 다니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했다. “따로 운동이 필요없다”며 “이래뵈도 내가 20대, 아니 10대 몸이라구”하며 껄껄 웃는다. 방금 전, 외로운 노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거실에 놓인 테이블은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플라스틱 인형 12만개가 떠받치고 있는 25㎡ 넓이의 유리판. 비디오와 설치미술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재미 미술가인 아들 도호씨(41)의 작품이다. 아들과 ‘예술적 대화’는 많이 하시느냐 여쭸더니 “예술은 대화로 될 일이 아니다. 저는 저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간다. 자식은 ‘내 것’이 아니니까” 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의 박식(博識)은 사색과 여행과 독서의 소산이다. 하지만 그는 다 ‘거짓’ ‘가짜’라고 일갈했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데 자꾸 만들어 내어 스스로 ‘고(苦)’에 갇히지 말라고 했다. 그는 초월을 이야기했지만 허무를 말하지 않았다. 그 점이 맘에 들었다. 줄기차게 인간을 그려온 것도 비켜서 바라보되 내가 서 있는 땅에 대한 굳건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또 이상(理想)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현실화 시키는 탁월한 현실주의자였다.

산정(山丁)은 인터뷰 내내 ‘버리라’ ‘비우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만한 욕심쟁이도 없었다. “가장 자유롭고 싶다” 했으니 이보다 더 큰 욕심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120호 이상 대형작품 11점이 선보이는 이번 도쿄전시에는 그의 방종자일(放縱自逸)한 자유표현이 담긴다. 칠순을 넘긴 영원한 현역 산정에게서 기자는 생의 에너지를 얻고 돌아왔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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