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내 안의 검은 물소리'…뒤틀린 내면의 외침

  • 입력 2003년 1월 28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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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내 안의 검은 물소리’.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연극 ‘내 안의 검은 물소리’.사진제공 극단 백수광부
자기 삶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타인의 삶에서 엑스트라가 된다.

영화배우를 꿈꾸는 비디오 가게 점원, 부끄럽지 않을 나를 준비하고 또 준비하며 혼자 사는 여자, 자신 있게 완벽한 코디를 제안하고 싶은 옷가게 점원, 일상의 리듬에 따분해 하는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 시장바구니를 든 채 오늘도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 있는 작가 지망생, 늘어가는 주름살과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여인, 새 집으로 이사가 옛 사랑을 잊고 싶은 여자.

한 동네에서 서로 마주치는 이 7인의 인물은 각자 삶을 상징하는 7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자,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6개 에피소드의 엑스트라다. 에피소드는 총 7개지만 각 에피소드는 다시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에피소드와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내면의 에피소드에서 비디오 가게 점원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홀로 집에 있는 여자는 고통을 무릅쓰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직시한다. 옷가게 점원은 자신이 제안하는 코디를 의심하고, 동사무소 직원은 일상의 리듬을 즐긴다.

작가지망생은 오락실을 맴도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고, 거울 앞의 여인은 주름제거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옛 사랑을 잊고 싶은 여자는 자신을 비웃는 듯한 사람들에게 외친다. “뭘 봐! 난, 새로 시작할 거야.”

내면의 에피소드는 아무 일 없는 듯이 돌아가는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꿈, 분노, 광기, 그리고 누구나 외치고 싶은 내면의 소리, ‘나’도 한 번 터뜨려 보고 싶은 외침을 들려준다.

20∼30대의 연출가 홍은지, 안무가 이은주, 그리고 연기자들이 공동구성의 방식으로 만든 작품답게 연기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곱 개의 에피소드가 끝난 후 이들은 다시 내면의 한 층 아래로 더 내려가 무의식을 퍼포먼스로 형상화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몸짓, 억압되고 뒤틀린 자아, 항상 점잖게 감춰야만 하는 욕망의 굴곡. 그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삶은 다를지라도 이 시대 도시 젊은이들의 내면에서는 동질적인 ‘두려움’과 ‘불안’이 발견된다.

‘지금’ 현실을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걸며 무대와 객석에서 이 시대를 함께 느끼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의 내면에 이렇게 불안과 두려움이 점철돼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또 한편으로 정말 슬픈 일이다.

무대의 주인공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 불안과 두려움의 무게는 7개 에피소드의 전개가 보여준 이 시대의 ‘속도감’을 무너뜨리고 조금은 불안정한 에필로그로 맺어졌다.

언젠가 이들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내면에서 ‘희망’과 ‘환희’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잔혹한 세상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기대일까?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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