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란 영화가 있었다. 아내가 강간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수십년을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10분밖에 기억을 못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날의 충격에 미쳐버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영리한’ 뇌가 취한 전략이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내측 측두엽을 들어내서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현재’의 기억만 간직하며 매 순간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고 싶은 것이다.
장진 감독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6·25전쟁을 다시 끄집어냈다. 첩첩산중의 동막골에 비행기와 함께 추락한 미군 병사, 낙오한 인민군, 탈영한 국군이 차례로 등장한다. 서로 적이 되어 싸워야 할 이들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옥수수를 따며 인간애를 느끼고 나중에는 폭격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희생을 자처한다. 적에 대한 본능적 적대감, 핏발서는 이념적 갈등, 무책임한 양민학살 등 한국전쟁의 비극이 압축돼 있다.
한반도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보며 일단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2002년 말 서울 강남 한복판의 무대 위로 끌어올려진 한국전쟁의 기억 속에서 그 ‘긴장’은 웃음의 옷을 입고 있다. 본능적인 기억의 신경이 안면의 근육을 당길 무렵이면 무대 위의 배우들은 어김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어준다.
과도한 진지함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임원희, 구수하고 자연스러운 웃음을 끌어내는 윤주상과 임하룡, 그 예쁜 얼굴에 넉살스레 정신나간 짓을 해대는 장영남, 온몸으로 관객을 잔뜩 긴장으로 몰아넣고는 모두가 그의 미소 ‘한 번’을 기다리게 만드는 신하균….
진지해야 할 민족의 역사를 재밋거리로 만드는 것은 모독이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이라도 그 진지함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은 것은 이 시대의 욕망이다. 그렇다고 역사의 의미를 잊자는 것은 아니다.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관객들은 ‘긴장’을 풀며 우리가 언제나 꿈꿔왔던 인간애와 평화의 ‘감동’을 안고 극장문을 나설 수 있다.
29일까지. 서울 강남 LG아트센터. 평일 오후 8시, 주말 및 공휴일 오후 3시, 7시. 월요일 쉼. 02-2005-0114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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