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이름이 더 맛있는 요리

  • 입력 2002년 8월 29일 16시 13분


캐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 ‘늑대와 춤을’을 기억하는가. 백인우월주의가 은연 중 몸에 밴 한 남자가 뜻밖의 사고로 인디언들과 생활하게 되고, 그들의 순수함에 동화되어 간다는 내용의 영화. 당시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극중 등장하는 인디언들의 서술형 이름들이었는데, 예를 들면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인물도 있었고 늑대와 어울려 뛰노는 주인공에게는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뜻이 있고 사연이 머무는 서술형의 이름들은 부르기만 해도 한편의 시가 되어 입가에 맴돈다. 오늘의 식탁에는 시적인 이름의 메뉴들을 모았다. 여름 속에 이미 숨어 있던 가을은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음식의 맛에, 이름에 취한 우리들은 시인이 된다.

●티라미수-나를 끌어 올린다

식후엔 껌을 씹거나 누룽지사탕을 굴리던 몇년 전에 비해 한국의 디저트 문화는 최근 눈에 띄게 발전했다. 호텔의 객실 영업보다 제과분야 매출이 더 짭짤할 정도. 이 디저트 열풍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밀푀유’라는 파이가 있다. 잠자리 날개마냥 얇고 빳빳한 파이 껍질이 겹겹이 싸여 있는 이 프랑스 과자는 한입 베어 물면 아삭한 감촉과 풍부한 버터향이 안면 근육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맛이 좋다.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이름 ‘밀푀유’는 직역하면 ‘천겹의 잎사귀’라는 뜻으로, 마치 천 장의 낙엽을 한번에 씹는 듯 바삭한 과자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밀푀유에 비해 보편화된 디저트 ‘티라미수’를 보자. 밀푀유가 프랑스제 고급 디저트라면 티라미수는 이탈리아제 가정식 디저트다. 티라레(tirare:당기다), 미(mi:나를), 수(su:위로)라는 뜻이 모인 티라미수는 말 그대로 ‘나를 위로 끌어 올린다’는 마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유인즉, 티라미수의 주재료인 카카오와 에스프레소의 독한 카페인이 자극적인 음식에 익숙지 않던 옛 사람들에게는 마치 몸이 붕 뜨는 듯 어지럽게 만들 만큼 강한 음식이었던 것. 오늘날 서울 한복판의 과자점에서 이 디저트들의 서술형 이름들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어떨까?

“‘천겹의 잎사귀’ 두 조각하고, ‘나를 위로 끌어 올린다’ 한 조각만 포장해 주세요.”

●과일단물과 가락지 빵-주스와 도넛

예로부터 양반의 고장으로 이름난 안동. 아무리 사무가 급해도 뛰면 아니되고, 궁해도 궁한 티 안 내었던 양반들은 각종 나물이며 전유어들을 한데 먹을 수 있는 제삿밥 생각이 날 때면 구실을 붙이기 위해 ‘헛’으로라도 제사를 올렸다 한다. 이렇게 생겨난 헛제삿밥은 나름대로 사연 있는 음식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듣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과일 단물’이란 말은 또 어떤가? 이는 바로 ‘주스’를 가리키는 북한말이다. ‘미제말’이라면 한사코 우리식으로 풀어서 발음하는 북한의 요리 사전에는 자연히 대한민국의 어휘보다 서술적인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어 표현 그대로 쓰는 ‘도넛’은 북한말로 ‘가락지 빵’, 그리고 ‘딸기잼’은 ‘딸기 단졸임’이라 불린다. 따라서 과일 주스 한 잔에 딸기잼이 든 도넛를 말하려면 “과일 단물 한잔에 딸기 단졸임이 묻은 가락지 빵”이 되는 것이다. 위트와 순수한 구석이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천사의 머릿결과 사자고추 겉절이

오늘의 요리 이름이 엽기적이라 생각 된다면 풀이를 보자. 붉은즙이란 북한말로 ‘토마토소스’를 말하며 사자고추란 ‘피망’을 부르는 단어다. ‘천사의 머릿결(angel hair 또는 cheveux des anges)’이란 파스타는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통용되는 이름으로, 파스타 종류 중 아주 면발이 곱고 가는 제품이다. 팬에 올리브유를 달구어 횡으로 썬 마늘을 볶다가 삶아둔 파스타를 넣고 토마토소스와 함께 자작자작 볶으며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추자. 마늘향이 배어든 면발에 섞인 단순한 토마토의 맛이 신선하다.

피망은 씨를 제거한 후 얇게 채쳐서 식초에 월계수잎과 함께 절여 얼마간 둔다. 숨이 죽어 부드러워진 피망은 꼭 짜내어 설탕, 소금, 고춧가루로 간하여 피클처럼 먹기 좋은 겉절이를 만든다. 천사의 머릿결과 사자고추가 얽혀 한 편의 시처럼 흐르는, 요리라는 예술이 뚝딱하고 탄생하는 순간이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생겨나는 음식의 이름들엔 이렇게 저렇게 사연이 붙어서 세상에 전해지지만, 나만이 아는 뜻을 지닌 음식 이름을 만들어 보는 것도 각별하고 애틋하다. 오래전 헤어진 한 친구와의 이야기다.

그는 필자가 굴을 무척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던지라 기분이 처져 보이는 날이면 으레 “재은, 굴 먹으러 갈까?”하고 묻곤 했다. 당시 ‘굴’이란 외자의 이름이 그와 나 사이에서 만큼은 ‘우울함을 떨쳐주는 바다냄새가 밴 꿀덩어리’ 정도로 통용되었던 것 같다. ‘굴’이라는 말만 떨어지면 내 눈이 반짝였으니 말이다.

우리 둘의 시간이 과거가 된 지 수천 일. 그래도 가끔씩 우울한 날이면 굴을 떠올리며 쓸쓸히 웃게 된다. 사연이 담긴 이름을 갖고 있는 음식은 실로 무서운 놈이다.

박재은 파티플래너·요리연구가

●천사의 머릿결

엔젤헤어 파스타 500g, 토마토 소스 1컵, 화이트와인 2큰술, 마늘 2,3개, 올리브유, 소금, 후추, 허브 약간(선택).

1. 파스타는 끓는 물에 슬쩍 삶는다.

2. 팬에 올리브유를 뜨겁게 달구어 횡으로 썬 마늘을 튀기듯이 볶는다.

3. 팬의 불을 줄이고 미리 삶아둔 1의 국수를 볶다가 화이트와인을 1∼2술 넣고 향을 돋운다.

4. 3에 토마토소스를 넣어 재빨리 볶은 후 불에서 내려 소금, 후추로 간한다.

※시중에 판매되는 토마토소스 대신, 생토마토와 케첩을 섞어도 좋다. 파르마잔 치즈를 뿌리거나 구운 빵을 곁들여 먹는 것은 선택사항!

●사자고추절임

피망 2개, 식초 1컵, 통후추 5,6알, 월계수잎 2장, 설탕 1큰술, 고춧가루 1큰술, 소금, 후추 약간

1. 피망은 반을 갈라서 씨를 빼고 길게 채썬다.

2. 1을 식초에 담그고 통후추, 월계수잎과 함께 1시간 이상 절여둔다.

3. 2에서 피망만 꼭 짜서 건지고 설탕, 고춧가루와 버무린다.

4. 3을 맛본 후 소금, 후추로 알맞게 간한다.

※서양 냄새를 강하게 하려면 올리브유를, 동양냄새를 더하고 싶다면 참기름을 반 큰술 정도 두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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