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명성황후’ 일부 내용 학계서 “史實과 다르다” 비판

  • 입력 2002년 7월 17일 17시 43분


‘태조왕건’ ‘여인천하’와 함께 사극 3인방으로 불렸던 KBS2 ‘명성황후’가 18일 막을 내린다. 이 드라마는 그동안 ‘민비’로 폄하돼 왔던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학계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지식산업사·2001)를 쓴 한양대 최문형 명예교수는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여러 차례 역사고증에 도움을 줬으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상당수 눈에 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최 교수와 ‘명성황후’의 작가 정하연씨의 주장.

▽최〓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나 당시 주한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전임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유력하다. 학계에서도 일본정부의 개입 가능성이 제기했으나 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직접 명성황후 시해를 지시했다는 건 지나치다.

▽정〓명성황후 시해는 불과 100여년 전 일이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없다. 모두 일본이 자국에게 유리하게 기록해놓은 역사뿐이다. 물론 개인적 추측이 반영된 점도 없지 않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일본의 주장은 진실이라 믿고 우리의 주장은 국수주의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최〓대원군은 1873년 고종의 섭정이 끝나고 명성황후가 사실상 실세를 장악한 이후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힘이 대등했으며 드라마 뒷부분에서 두 사람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화합한 것으로 그려졌다. 이 또한 잘못된 해석이다.

▽정〓수면으로 드러난 대원군의 권력은 크지 않았으나 재야 정치세력이나 상인들의 지지를 받는 실세였던 것은 틀림 없다. 일본이 죽여야겠다고 생각할만큼 명성황후가 일본에게 위협적 존재였던 것은 대원군과의 암묵적 협력으로 그의 지지기반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도 없지만 거짓이라는 증거도 없다.

▽최〓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를 협조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극에서는 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죽음을 막고자 끝까지 저항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대원군이 협조했다면 명성황후 시해는 훨씬 빨리 진행됐을 것이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주도면밀히 뒷수습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 결국 시체를 태워버리고 만다. 이는 대원군이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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