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一. 四海는 하나가…(10)

  • 입력 2002년 6월 27일 16시 28분


웅크린 호랑이②

장군가의 자제답게 항량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다. 당연히 성취도 있어 유협(遊俠)들 사이에서도 무예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았고, 난군(亂軍) 속에 떨어져도 몸을 가릴 만큼은 되었다. 하지만 방금 본 검기(劍氣)는 그런 항량에게도 눈부셨다.

가만히 문을 열고 나선 항량은 짐짓 발소리를 죽이며 뜰을 가로질러 항우에게로 갔다. 조카의 무예수련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몰래 조카의 성취를 가늠해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떨기나무와 굵은 나무등걸에 몸을 감추어가며 다가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항우는 칼끝을 땅바닥 쪽으로 늘어뜨린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덟 자 키에 우람한 몸매와 순진해 뵈면서도 위엄 서린 얼굴이었다. 당시의 자[척]는 약간 짧아, 여덟자라 해봤자 뒷날로 치면 여섯 자 남짓이었으나, 그 키만으로도 일반적으로 왜소한 초나라 사람들에 견주면 산악(山嶽) 같다 할 만했다. 그 늠름하고 환한 항우의 모습이 다시 항량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그 사이 한숨을 돌린 항우는 장검을 칼집에 거두더니, 나무 등걸에 기대 세워두었던 창을 집어들었다. 긴 자루 끝에 쌍날이 달려 베기와 찌르기를 겸할 수 있는 창으로, 날은 진과(秦戈)와 달리 쇠로 벼려져 있었다. 자루도 철갑을 씌워 여느 창보다는 몇 배나 무거워 보였다.

항우는 계부(季父)가 숨어서 보고 있음을 알기나 하듯 창을 들어 천천히 창법을 펼쳐 보였다. 처음에는 단병접전(短兵接戰)에서의 창법이었는데 찌르고 베는 기세가 사납고 매섭기 그지없었다. 다음은 여럿과의 차륜전(車輪戰) 형태인데 대여섯 군데에서 번갈아 치고 드는 적을 받아내는 동작이 여간 엄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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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대병(大兵)속의 혼전을 헤쳐나가는 창법이었다. 사방팔방, 상하좌우에서 베고 찔러오는 창칼을 퉁겨내며 맞받아 베고 찌르는 것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창날의 속도는 빨라졌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자 다시 항우의 몸은 창대가 짓는 그늘과 창날이 내뿜는 빛의 장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놀랍구나. 어느새 이 아이의 솜씨가 이토록 휘황하게 어우러졌단 말이냐….)

항량은 그렇게 감탄하며 문득 항우가 처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 날을 떠올렸다.

몇 년 전 항량이 처음 항우에게 가르친 것은 글이었다. 비록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숨어살았지만 태어난 가문 덕분인지 항우는 그때도 초나라의 서법(書法) 정도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를 아우른 시황제가 문자를 하나로 통일하자 항우는 문맹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이에 항량은 다시 진의 서체인 전서(篆書)를 배우게 했던 것인데, 결과는 뜻 같지가 못했다.

“끝엣 아버님[季父], 문자란 자기 이름만 쓸 줄 알면 넉넉한 것입니다. 도필리(刀筆吏〓문서를 맡은 관리)로 일생을 살고자하지 않을 바에야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문자를 다 익힌답니까?”

어느 날 항우는 그렇게 말하며 책을 덮더니 다시는 펴려 하지 않았다. 항우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항량이라 억지로 글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다. 한동안 항우를 살피다가 슬며시 권해 보았다.

“그럼 칼쓰기를 배워 보겠느냐? 무(武)란 대장부가 마땅히 본업으로 삼을 만한 것이니라.”

항우는 그 새로운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처음 얼마간은 항량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돈 들여 불러들인 무예의 달인(達人)들로부터 새로운 무예 초식(招式)을 전수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반복단련에 싫증이 났는지 곧 검술에 시들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 초나라가 진에게 망한 것은 결코 문(文)이 뒤져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목을 잘라오는 것을 그 어떤 공보다 으뜸으로 삼는 저들의 상무(尙武)에 진 것이었다. 너는 진병의 칼날 아래 피를 뿜고 쓰러진 부조(父祖) 이대의 한을 잊지 말라!”

항량은 항우가 무예 익히기를 게을리 할 때마다 그렇게 다그쳤으나, 항우는 왠지 불만한 기색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무(武)라는 게 손목과 팔로 창검을 익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항량은 그 말이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핑계로만 받아들였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그 몇 년 항우는 무예에 온 힘을 쏟아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고, 이제는 그 성취를 바탕 삼아 보다 높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어르신[大人], 주인 어르신.”

갑자기 누가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항량이 얼른 돌아보았다. 늙은 청지기가 아전바치[郡吏]하나를 데리고 저만치 서 있었다.

(또 무슨 일인가. 이번에는 몇 명이나 긁어모아야 하나….)

아전바치를 알아본 순간 항량은 짜증부터 났다. 대낮부터 사람을 보낸 것으로 보아 회계수(會稽守〓회계 태수. 太守란 관명은 漢代부터 쓰인다)가 또 군역(軍役)이나 요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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