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음악인 권익 옹호 앞장선 첼리스트 전봉초 선생

  • 입력 2002년 5월 5일 18시 45분


4일 별세한 전봉초(全鳳楚·첼리스트)씨는 수많은 후진을 양성한 한국의 대표적 첼리스트 겸 첼로 교육가이자 음악인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앞장선 음악계의 기둥으로 꼽힌다.

평남 안주의 상인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초등학교 재학시절 작곡가 김동진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숭실중 재학시절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등 일찍이 바이올린에 소질을 보였으나 3학년 때 첼로의 ‘혼을 켜내는 듯한 음색’에 빠져 전공을 바꿨다.일본 도쿄음대 재학시절에는 유학생들과 함께 4중주단을 조직하는 등 뛰어난 조직력과 행정력을 보이기도 했으며 연주실력을 인정받아 NHK 교향악단 전신인 일본교향악단 등의 단원으로 활동했으나 학병징집을 피해 만주로 가 그곳에서 광복을 맞았다. 월남 후 서울대에 재직하면서 수백명의 첼리스트를 제자로 키워낸 그는 생전에 “우리나라 첼리스트의 80%는 내 직계”라며 풍성한 ‘인복’을 자랑하기도 했다.

검은 베레와 버버리코트를 즐겨 입어 ‘영국신사’로 불린 그는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성품 탓에 음악가의 권익을 옹호하는 각종 단체에 자의 또는 타의로 앞장서 활동했다. 79년 서울대 음대학장 재직시절에는 당시 문교부가 음대 교수의 레슨에 제동을 걸자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과감히 발표하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는 직선적 성격 탓에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음협 이사장을 거쳐 예총 회장을 지내는 등 음악계의 대표적 ‘얼굴’ 역할을 해온 그는 이 외에도 국제음악애호가협회 한국본부 이사장, 안익태기념사업회 재단이사장, 코리안심포니 이사장 등을 맡기도 했다. 만년에도 10년이 넘은 ‘고물차’를 직접 몰며 검소한 생활을 유지한 그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체력관리를 하는 등 자기관리에 열심이기도 했으며 지난해 11월에도 아들 딸 사위 등 가족들과 실내악 연주회를 여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으나 올해 2월 위암이 발견돼 투병해왔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