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CF감독 차은택 뮤직비디오 작업장

  • 입력 2002년 2월 21일 14시 18분


차은택(33)은 최근 명성황후를 소재로 한 감동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화제를 모은 젊은 CF 감독.

17일 경기 가평군 청평리의 어느 마을 입구. 그는 요즘 인기가 치솟고 있는 탤런트 유준상을 주인공으로 무명의 신인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두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 소녀가 미끄러져 길 옆으로 떨어지는 촬영장면. 그는 같은 장면을 해가 저물 때까지 찍고 또 찍는다.

뮤직비디오가 뮤직을 압도하고 있는 요즘, 차 감독은 이 분야에서 ‘서정시인’이라고 불린다. 이동통신 TTL 광고나 가수 박지윤의 ‘성인식’ 뮤직비디오 등을 만들어 일찍 명성을 떨친 박명천 감독은 알 듯 말 듯한 신비롭고 낯선 이미지로 관심을 끌었다. 이에 비해 차 감독의 작품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드라마적 구조를 가지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정서에 호소하는 쪽이다.

최근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발라드풍으로 부른 곡 ‘나 가거든’에 맞춰 명성황후의 비극적 시해 장면을 그린 작품은 뮤직비디오로는 드물게 10, 20대를 넘어 30, 40대로부터도 큰 공감을 얻었다. 명성황후 역을 맡은 이미연씨가 일본 낭인들의 칼날 앞에서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내가 조선의 국모”라고 외치는 장면은 보는 이들에게 비장함이라 할만한 감동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는 뮤직비디오를 “감독 스스로 음악에서 감동을 느껴야 시작할 수 있는 작업”으로 생각한다.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과 함께 음악테이프를 전달받으면 그는 우선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오디오를 켠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어떤 느낌이 다가올 때까지 수십번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다. 그래도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음악이라면 차라리 제작을 단념한다. “감독 자신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데 그것을 전달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 감동을 에너지로 작품 구상이 시작된다. 작품 구상은 “포스트 잇의 낙서에서” 출발한다. 음악을 듣다보면 부분 부분 끊어진 형태로 어떤 장면들이 그의 머릿 속을 스쳐간다. 산만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생각나는 대로 그때그때 포스트 잇에 간략하게 적어 벽에 붙여둔다. 포스트 잇들은 처음에는 중간 중간이 사라진 퍼즐처럼 연결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걸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나 누군가와 그걸 두고 얘기를 나눌 때 갑자기 전체적인 구성이 확 그려지는 순간이 있다.

작년 그가 만든 가수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 뮤직비디오는 뮤직비디오를 전문으로 내보내는 케이블방송 m.net의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 작품을 구상할 때 그는 먼저 여배우가 직접 노래하는 모습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영화 ‘스탠 바이 유어 맨’에서처럼 수감 중 잠시 외출을 나온 사연 많은 남자가 노래하는 여자를 쳐다보는 이미지도 떠올랐다. 시나리오 작가 김영찬씨는 그 남자가 여자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캐릭터의 소유자였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컨셉트는 콘티를 짤 때, 촬영을 할 때, 편집을 할 때도 계속 변화를 겪는다. 남녀 주인공을 가로막고 있는 가판 매점의 유리창을 검게 코팅함으로써 밖에 선 여자가 안의 남자를 보지 못하도록 하자는 생각은 촬영 중에 떠오른 것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여분의 촬영을 진행하긴 했지만 촬영을 마칠 때까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생각은 편집하는 시점에 가서야 비로소 분명해졌다. 뮤직비디오는 동일한 상황을 보는 남녀의 각기 다른 두가지 시선을 담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감독은 한 작품을 만드는 동안 크고 작은 수천번의 판단을 해야 한다. 소품 벽지의 색깔과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평소 머릿 속에 무수히 많은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만화든 영화든 틈만 나면 늘 무엇인가를 본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시기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는 만화는 그의 가장 큰 데이터베이스다. 요즘은 각기 다른 삼국지 만화 3종을 서로 비교하면서 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덕분인지 시나리오가 스크린에 옮겨졌을 때 어떤 화면이 될 지 사전에 예측하는 능력은 그가 가장 자신있게 생각하는 장점이다.

그는 늘 스케줄에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 최근 개봉된 영화들을 본다. 회의를 하러 가다 회의가 연기됐다는 연락이라도 받으면 그는 어김없이 가까운 극장으로 자동차의 방향을 돌린다. 지난 주 새로운 촬영준비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서도 ‘블랙 호크 다운’과 ‘공공의 적’을 봤다. 그러다보니 가끔 극장에서 아내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사정을 모르는 아내는 “바쁘다는 사람이 영화는 왜 그렇게 잘도 보러 다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영화를 볼 때는 화면에 나오는 티스푼과 컵의 디자인 등과 같은 세밀한 부분까지 눈여겨 보는 게 버릇처럼 돼 있다. 영화 ‘잔 다르크’에서 화형에 처해진 잔 다르크의 손과 발이 서서히 타들어가는 끔찍한 장면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 기억이 떠올라 명성황후의 시신이 일본 낭인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장면을 찍을 때 이미연씨와 똑같은 모양의 밀랍인형을 만들어 명성황후의 손발이 실제로 타들어 가는 듯한 장면을 찍었다. 그 장면은 끔찍할 정도로 실감이 나서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차감독은 흔히 같은 또래의 박명천 감독과 비교된다. 두사람은 대학 88학번의 동갑내기 감독이다. 차감독은 동국대에서, 박감독은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둘 다 서울 출신이고 중산층 집안의 문화적인 분위기속에서 성장했다. 차감독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합창단을 지휘했고 박감독의 아버지는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두 사람이 대학에 들어간 88년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고 PC가 막 확산되기 시작한 무렵. 과거 어느 세대보다도 풍부한 영상을 접하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둘은 한때 같은 프로덕션에서 조감독으로 함께 일한 적이 있어 서로 ‘명천이’ ‘은택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지금도 선배 김규환 감독이 세운 광고학원 엔터스쿨의 공동자문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치열한 경쟁자이기도 하다. 그는 “명천이의 새 작품을 보면 어떻게 저런 것을 다 미학적 이미지로 승화시키는지 놀라워 하루 이틀은 잠을 자지 못한다”며 “노트북을 켜놓고 스타크래프트라도 한번 하려고 해도 박감독의 작품이 떠오르면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돼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차감독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술 먹을 여유가 없다. 하루 3시간도 채 못 자고 일해야 하는 그로서는 술은 피하고 싶은 유혹이다. 저녁에 술을 먹게 되면 밤에 다시 회사에 들어와 작업하기가 어렵고 이튿날 아침까지 영향을 받는 게 두렵다. 그런 철저한 자기관리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이 분야의 젊은 감독들 사이에는 습관이 돼 있다. 음악이 나온 뒤 뮤직비디오 제작까지 주어지는 시간은 3주 정도. 이 빠듯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그는 이날도 30여명의 스태프를 이끌며 밤샘촬영에 들어갔다.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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