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9년 마감하는 이강숙씨

  • 입력 2002년 2월 20일 18시 36분


《28일 퇴임하는 이강숙(66)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방 한쪽에는 자그마한 그림 한 점이 놓여져 있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 남자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무릎에 펴놓은 물건은 노트북 컴퓨터일 것이다.

남자는 무엇을 쓰고 있는 걸까. 기자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 그는 “얼마전 휴가때 아내가 강릉에서소설 쓰는 나를 그렸다”며 겸연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현대문학’ 1월호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수십년 묻어온 작가의 꿈을 이룬 그는 요즘 시간이 남을 때마다 컴퓨터앞에 앉아 소설을 쓰는 것이 낙이라고 말했다.

이총장은 93년 개교때 초대 총장 (당시 교장)으로 취임, 9년동안 학교의기틀을 다졌다.그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예술종합학교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 정부는 그의 기여와

헌신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예술종합학교 음악원도 그에 대한 예우로 새학기에 ‘인간과 예술’ ‘음악학 연습’ 두 과목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사람 만나고 결재하는 일에 매달려 있다가 강의를 한다니 벌써부터 그렇게 신이 날 수 없다’며 소년처럼 즐거워했다. 강의 이외의 제1목표는 단연 ‘집필’. 소설 외에 예술철학과

예술행정에 대한 책도 구상중이라고 그는 말했다.》

-9년 전,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학교 설립이 추진될 때를 회고해 주시죠.

“임명 받기 전 일한 것까지 더하면 9년 5개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암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라 몸이 성치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꼭 해야 하겠다는 오기가 들더군요. 우리의 음악을 한국의 음악교육 토양에 심어내야겠다는 평소의 신념과도 결부되는 일이기에, 기쁘게 만사 제치고 매달렸습니다.”

KBS교향악단 총감독을 지낸 일이 있지만, 학교행정은 당시가 처음. 이총장은 “정부 주무국장과 장차관, 학교에 파견나온 사무국장 등 아무나 붙들고 어떻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지 무턱대고 묻는게 일이었다” 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예술가를 시켰더니 행정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 애를 썼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에 문득, 아련한 추억과도 같은 빛이 스쳤다.

-청사진에 불과했던 학교에 와서 음악원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등 6개원(院)의 당당한 체제를 갖춘 한국 예술교육의 중심으로 발돋움 시켰습니다. 자부심과 아쉬움이 교차하실텐데요….

“자부심이라면 취임 당시의 약속을 지켰다는 겁니다. 개교후 1년뒤 국회 감사에서 한 의원이 ‘학생들이 세계적 콩쿠르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학교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이제 1년밖에 안지났다. 지켜봐달라’고 했죠. 이제는 음악 뿐 아니라 무용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 학생들이 세계 최고의 영재들과 겨뤄 이기고 있습니다. 학습공간의 부족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 ‘감사’라죠. (웃음)

“학교를 맡고 나서 처음 국회 감사를 받으니 당혹스럽더라구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두 도움을 주는 충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監査)’도 ‘감사(感謝)’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분에 따라 ‘감:사야’ 또는 짧게 ‘감사야’하고 바꿔서 부릅니다.”

새 학교를 궤도에 올리는데 헐뜯는 말도 많았을 법 하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꿋꿋함으로 온갖 험담을 비켜나갔다. 한 번은 주무장관을 지낸 한 인사가 노골적으로 친인척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하는 바람에 고성이 밖으로 튀어나가 주변에서 무척 놀랐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뭐 그런 얘기까지…’라며 화제를 돌렸다.

-에세이집에서 술을 무척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하셨고, 저도 크게 당한 일이 여러번입니다만, 주변에선 술과 바둑에 대해서만큼은 ‘승부욕’ 이 대단하시다고들 합니다.

“남들보다 먼저 취한 적은 없습니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돌려 사람들이 ‘예종주(藝宗酒·예술종합학교술)’라고들 하는데, 부족한 예산으로 양주대접을 할 수는 없으니 빨리 취하고 친해진 다음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된 거죠.”

문화 예술계 인사들 사이에는 그의 ‘격조 있는 음담’ 실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져있다. 젊은 여성 예술인들도 그의 ‘예술적 음담’엔 미소를 지을 정도.

-요즘 직원들 사이에서 ‘부부싸움 카운슬러’로도 명성을 날리고 계시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길 가다 노부부를 보면 ‘야, 백전의 노장들이다’ 싶어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겠습니까. 부부싸움한 얘기를 들어보면 남자쪽에서 참았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도 경험이니까, 내 경험중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꼭 얘기해주곤 합니다.”

화제를 뒤늦게 꽃피운 ‘문청(文靑)’의 꿈에 대한 쪽으로 돌렸다. 그는 최근 발간을 앞둔 ‘세계의 문학’ 봄호에도 첫 중편 ‘버스는 지금도 달리고 있다’를 발표한다. 유년기 체험과 함께 ‘예술적 모국어’를 강조해온 평소의 신념도 문학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음악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다빈치식 ‘전방위 예술가’의 개념을 꺼냈다.

“제가 거기 합당한 재주있는 사람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살아나가면서 표현하고 싶은 방식이 있는데 그 재료가 어떨 때는 문자, 어떨 때는 소리, 때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표현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죠.”

-피아니스트로, 음악학자로, 음악교육행정가로 다양한 삶을 사셨는데 또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모습이 젊어 보입니다.

“하고 싶은 걸 해야 몸에도 좋다더군요. 옛날에는 ‘인간도 음악도 사회적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이제는 그 ‘인간’과 ‘사회’에서 잠깐씩 놓여나고 싶어졌습니다.”

대담을 마치기 전, 기자는 4년 전 옛 얘기를 하나 꺼냈다. ‘학교가 잘못되고 있다며 흠을 내는 목소리가 있다’고 얘기하자, 이총장은 ‘내가 혼자 하는 학교라면 없는 잘못이라도 있다고 하겠는데, 많은 교수들과 직원들이 열성을 바치고 있으니 잘못됐다는 말은 못하겠다’고 대답했던 것.

“하하… 그랬던가요. 맞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열과 성을 바친 학교이지 제가 잘나서 여기까지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총장은 문앞까지 기자를 배웅하며 “‘이강숙 얘기’보다는 9년된 이 학교가 오늘날 이렇게 번듯한 대학이 됐다는 얘기를 위주로 써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이강숙 총장

- 1936 경북 청도 출생

- 1961 서울대 음대 졸업(피아노 전공)

- 1964~1968 계명대 조교수 및 서울대 음대 강사

- 1975 미국 미시건대 음악교육학 박사

- 1975~1977 미국 커먼웰스음대 조교수

- 1977~1992 서울대 교수

- 1981~1983 KBS교향악단 총감독

- 1993~2002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2002 월간 '현대문학' 1월호 단편소설 추천 등단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