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태백 예수원에서… '낡은 일상으로부터 탈출'

  • 입력 2002년 2월 7일 15시 20분


예수원 예배실 제단 앞에서 누군가가 무릎꿇고 기도하고 있다
예수원 예배실 제단 앞에서 누군가가 무릎꿇고 기도하고 있다
무책임하지만 갑자기 일상에서 손을 떼고 실종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팽이처럼 제 자리를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업무가 압박할 때, 세상을 위해 정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 때….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어 침묵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지 않은가.

서울 청량리역에서 태백행 열차를 탔다.

강원 태백 산골짜기의 예수원.

‘땡 땡 땡….’ 하루 세 번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인 삼종(三鐘). 1일 아침 6시 하사미 외나무골에 어김없이 삼종이 울린다.

아침기도(朝禱)와 묵상의 시간. 전날 낯선 잠자리에 밤잠을 설친 탓인지 졸음이 가시지 않는다. 생각은 서울에 남기고 온 잡다한 일들 속을 헤매다가 느닷없이 떠오르는 사소한 기억들로 쉽게 빠져든다. 예배실을 빠져나와 혼자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예수원 앞 계곡 물을 따라 산 안쪽으로 500m쯤 떨어진 야외 기도처까지의 그 길. 본래 감자 옥수수 밭인데 온통 눈밭으로 변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나무숲을 스치는 스산한 바람소리 뿐. 나 혼자 서 있다는 느낌. 그렇다. 모든 시대의 수도자들은 깊은 산의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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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세 번의 식사는 예수원 회원과 손님들이 모여서 같이 한다. 아침 식사. 예배실에 20개 정도의 밥상이 펴지고 밥상마다 8인분의 식기가 놓인다. 국 하나에 김치를 포함해 찬이 둘 뿐인 간소한 밥상이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활기가 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빵은 하나인데 우리가 그 빵을 함께 나눠 먹음으로써 우리 많은 사람들은 한 몸이 된 것이다.” 사귐은 밥상에서 출발하는 모양이다.

식사 후 티룸(Tea Room)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곧 오전 작업시간. 예수원은 전적으로 회원과 손님들의 자발적 노동으로 운영된다. 자매(여자)들은 주로 부엌일을 돕고 형제(남자)들은 예수원으로 올라오는 산길의 눈을 치운다. 모처럼의 육체노동은 힘들다기보다 차라리 즐겁다. 예수원의 설립자인 대천덕 신부는 늘 이렇게 가르쳐 왔다. ‘노동하는 것은 기도요, 기도는 노동이다.’

낮 12시 점심 삼종이 울린다. 점심을 먹기 전에는 남을 위해 기도하는 대도(代禱)의 시간을 갖는다. 예수원에는 약 40명의 회원이 함께 살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공동체 생활은 ‘내 것과 네 것의 구별’ 혹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음’이 아니라 ‘주고 받음’의 관계다.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는 일도 주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다. 받음으로써 우리는 주는 사람에게 그도 줄 수 있는 선물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받는 것은 남이 우리 생애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고 ‘당신 없이는 오늘날의 내가 있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후 1시부터 2시까지는 소(小)침묵의 시간이다. 시끌벅적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순식간에 침묵이 예수원을 감싼다. 오후에는 작업이 없다. 어떤 이들은 티룸에서 대화를 나누고, 어떤 이들은 침묵기도실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어떤 이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쓴다. 어떤 이들은 숙소에 들어가 부족한 잠을 자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눈길을 헤치며 산을 오르기도 한다. 도서관에 앉아 필립 얀시의 책을 펼쳐본다. 한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오늘날 남자들이 가져 보았음직한 초자연적 순간이 있다면 짝 달라붙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미셸 파이퍼를 보고 있을 때라든가 매년 간행되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여름 수영복 특별호 잡지를 구석구석까지 면밀히 뜯어볼 때인지 모른다. 수영복 모델들이 종종 ‘여신’들로 불리는 현상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우상숭배라고 부르는 것을 오늘날 계몽된 서구인들은 중독이라 부른다. 중독되는 대상은 좋은 것들일 수 있다. 예컨대 섹스와 음식, 일 같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좋은 것들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본연의 위치를 넘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을 때 그것이 우상숭배다. 우상은 구약성경의 금송아지가 그랬듯이 한 사람의 전적인 헌신을 감당할 능력이 없고 그를 낙담시킬 것이다.’

오후 6시. 종이 울린다. 저녁 기도(晩禱)를 올리는 시간. 때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을 때 종소리가 나기도 하지만 종이 울리면 이야기를 멈추고 짐을 내려놓는다.

밀레의 그림 ‘만종’에도 석양의 종소리에 맞춰 일을 멈추고 기도하는 농부 부부가 나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펄프 픽션’이나 ‘내추럴 본 킬러’의 세련된 잔혹함을 좋아하는 사람과 ‘포레스트 검프’의 따뜻함을 좋아하는 사람. 다행스럽게도 세상에는 아직도 ‘포레스트 검프’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냉철한 지성과 예민한 감성 외에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차원,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순수하고 맑은 ‘농부의 신앙’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밤 9시. 저녁 예배 후 예수원은 다시 깊은 침묵에 들어간다. 이곳의 규율대로 아침 6시까지는 대(大)침묵의 시간이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같다. 새벽에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다시 걷는다. 달이 뜨기 전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별빛은 숲과 우주가 만들어낸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같다.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빛나듯이 친절한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니 나 자신 얼마나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량한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니 나 자신이 얼마나 나를 포기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예수원은 이런곳

예수원(Jesus Abbey)는 성공회의 대천덕 신부가 1965년 세운 수도원. 다른 수도원이나 선교단체와는 달리 설립 당시부터 확실한 방향을 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실험과 개척자적 정신을 특징으로 해 왔다. 공식적인 주일예배는 성공회 미사 형식을 따르지만 매일 저녁 예배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초교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종파나 남녀의 구별없이, 기혼 미혼에 상관없이 숙소가 허락하는 한 손님을 받는다. 방문 기간은 2박3일을 원칙으로 숙식비는 없고 형편에 따라 헌금할 수 있다.

대천덕 신부는 95년 원장 직에서 물러났고 97년부터 7인 장로제로 운영되고 있다. 약 40명의 정회원이 있으며 정회원 5,6명이 돌아가면서 의회를 구성, 매일 아침 회의를 거쳐 그날의 프로그램을 결정한다. 정회원은 공동재산제를 원칙으로 한다. 목장 등을 운영해 생활자금을 충당하고 있다.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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