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광장축제'…감탄이 절로

  • 입력 2002년 1월 15일 18시 11분


《차이코프스키와 ‘비창교향곡’, 중세 정교회 성가부터 민요 ‘카츄샤’ 까지…. 강건하면서 애수에 찬 러시아 음악을 떠올리지 않고는 러시아를 이야기할 수 없다. 혁명후 70여년 동안 클래식은 체제의 우위를 선전하는 강력한 도구이자 무기이기도 했다. 붉은 깃발이 내려진 지 10년, 러시아 고전음악도 이제는 강철의 베일을 벗어 던지고 세계 음악계의 열린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2000년 이후 여러차례 구소련 음악계의 거장들과 행정가를 만나며 러시아 음악문화의 소개에 앞장서온 유혁준씨가 2001년 이 나라의 겨울 음악축제 현장과 풍요로운 음악전통의 자취를 살펴보고 러시아 음악문화의 실체를 진단한다. (편집자)》

'온화하고 편안한 공간에/밤의 그림자는 쌓여간다/화로의 불은 꺼져가고/촛불은 벌써 다 타버렸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음악 ‘4계’ 가운데 ‘1월-화로가에서’는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푸쉬킨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밤을 그린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러시아의 겨울은 언제나 혹독한 추위로 인간의 삶 자체를 위협해왔지만, 시련을 감내하고 위대한 문화를 일구어온 러시아인들에게 기나긴 겨울밤은 소중한 여가를 가꾸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후 4시면 어둠이 깃드는 한겨울. 러시아인들은 이때부터 자신들만의 문화를 즐긴다.

러시아를 진정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겨울이 제격이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그리고 대평원, 듬성듬성 하얀 줄기를 드러내고 애처롭게 서있는 자작나무숲. 동토의 대지 이면에서는 삶에 대한 강렬한 몸부림이 소리없이 진행된다.

2일 오후 3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25년만에 찾아온 영하 30도의 추위속에서, 얼어붙은 네바강 하구 핀란드만의 석양 한가운데 섰다. 수평선 쪽으로 눈과 함께 붉게 물든 노을은 신비스럽기만 했다. 네바강은 영하 20도가 되어야 얼음을 뚫고 피어오른다는 물안개로 자욱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마지막 교향곡 ‘비창’을 초연한 그날 저녁 마신 네바강 물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했던가? 얼어붙은 귓가로 차이코프스키의 로망스 ‘다만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의 선율이 스쳐갔다.

12월 27일부터 1월 5일까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을 중심으로 ‘예술광장축제(Art Square Festival)’가 열렸다. ‘예술광장축제’는 공산화 이전 음악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겨울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문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3년 전 시작된 축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예술가들을 동원하면서 6월 마린스키 극장이 주최하는 ‘백야축제’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대 문화축제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개막 연주회 현장은 한껏 멋을 부린 러시아 청중과 관광객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표정만큼이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전반부에서는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 협연으로 슈만의 첼로협주곡의 바이올린 버전이 연주돼 낭만적인 노래가 깃들인 촉촉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의 2악장 ‘안단테’에서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예의 지휘봉 없이 양손만으로 부드럽게 오케스트라를 장악해갔다.

러시아 최고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두터운 현의 울림은 입석까지 매진돼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한 객석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1839년에 완공되어 일찍이 무도회장으로 사용된 필하모니아 볼쇼이홀의 전면에는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위용을 자랑하고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의 배경으로 쓰인 1층 객석은 연주회 도중에도 찬란한 불빛을 발하는 샹들리에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함께 완벽한 음향을 들려주었다. 160년 전에 어떻게 이렇듯 훌륭한 연주홀을 지을 수 있었는지 경이로울 따름이다.

유리로 장식된 홀의 상단은 전기가 없던 시대 밤을 밝히는 백야를 염두에 두었음이리라. 드디어 4악장 피날레가 끝나고 무대로 던져지는 수많은 꽃다발을 보면서 이 나라에서 음악은 과시가 아니라 생활임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렇듯 문화가 있어 춥지만은 않은 겨울밤 풍경은 이곳에서 열흘 동안 내내 이어졌다. 공연장뿐 아니라 수많은 궁전,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세계 수준의 음악이 연주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예술광장축제 현장을 지켜보는 마음 한가운데는 유독 겉치레가 중시되는 우리 공연문화의 현실이 교차되고 있었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KBS 1FM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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