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도굴 실태]"한건만 해도 큰돈" 도굴꾼-암거래단 횡행

  • 입력 2001년 12월 10일 18시 11분


고려 공양왕릉의 도굴 의혹이 제기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이곳 말고도 국내 곳곳에서 도굴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국내에 어떤 도굴이 있었고 도굴꾼들은 어떻게 도굴을 하는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문화재 도굴의 실태를 알아본다.

▽광복 이전 도굴 사례〓본격적인 도굴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시작됐다. 일본인들은 1910년대 개성과 강화도 일원에서 고려 고분을, 1920년대 대동강 하류의 낙랑고분과 경상도의 신라 가야 고분을 도굴했다.

당시 신라 가야 고분 도굴을 조종한 인물은 일본인 문화재 수집가 오쿠라였다. 충청지역 도굴은 공주고등보통학교 일본어 교사로 일하던 가루베라는 인물이 맡았다. 가루베는 1920년대말∼30년대초 송산리고분 등 공주 지역의 백제 고분을 거의 모두 도굴했다. 그는 도굴 직전, 먼저 개를 고분에 들여보내 내부의 냄새를 맡아 유물 성격을 파악하는 수법까지 동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1년 발굴된 공주 무령왕릉은 천만다행으로 가루베의 도굴을 면한 것이었다.

▽광복 이후 도굴〓한국인에 의한 도굴은 60년대부터 기승을 부렸다. 60년대 경주 교동의 한 폐고분에서 금관이 도굴됐다. 다행히 도굴꾼이 붙잡혀 금관을 회수했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중이다.

94년에는 경북 영풍의 고려 순흥벽화고분과 경남 합천의 가야고분 3기가 도굴됐다. 97년엔 경주 진덕여왕릉이, 98년엔 경주 금척리고분, 구미 인동고분, 대구 칠곡 구암동고분이, 99년엔 경남 창원의 조선시대 최윤덕장군 묘가 도굴됐다.

2000년엔 경북 경주시 강동면의 신라 고분 50여기가 통째로 도굴됐고 올해 3월엔 사리를 도굴하기 위해 국보 54호인 전남 구례 연곡사의 부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굴 수법〓도굴꾼 사이에서 전해오는 노하우를 바탕으로 오랜 ‘실전’ 경험을 통해 배운 ‘감’으로 고분을 찾아낸다. 도굴꾼들은 쇠꼬챙이로 고분을 찔러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쇠꼬챙이의 촉감을 통해 금속유물인지 자기류인지 감을 잡는다. 또 풍수지리 지식을 통해 명당에 위치한 고분을 물색한다. 96년 경주 흥덕왕릉을 도굴하다 붙잡힌 범인도 “산세만 보고 도굴 고분을 찾아냈다” 말한 바 있다. 도굴꾼들은 명문가 족보를 입수해 유명한 조상들의 묘가 있다는 산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들은 도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심야를 틈타 봉분 위나 아래쪽에서 가로 세로 1∼2m 정도로 구멍을 뚫고 내부로 들어간다. 이번 공양왕릉 도굴과 흡사하다.

도굴당하는 고분은 주로 넓은 석판으로 만든 석실이나 석관이 들어있는 고분들. 봉분의 흙만 파고 들어가면 바로 부장품이 안치된 방에 도달할 수 있어 도굴이 수월하다. 반면 관 위에 무수한 돌을 쌓아만든 고분(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구조상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경주의 천마총 황남대총이 도굴되지 않고 발굴될 수 있었던 것도 적석목곽분이었기 때문이다.

▽도굴품의 행방〓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 문화재 암거래단과 점조직으로 연결된 도굴꾼들은 도굴품을 골동시장에서 밀거래하거나 외국으로 빼돌린다. 최근 영남 지방에서 도굴된 자기류가 일본으로 유출된다는 소문도 있다. 도굴꾼들은 국내에서는 공소시효(7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도굴품을 내다 판다. 이들은 한 건만 잘 건져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 수집가들은 도굴품이라는 것을 알고도 구입하는 경우도 있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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