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는 왕실사찰"…왕실용 자기 출토 학계 관심

  • 입력 2001년 11월 27일 18시 31분


경기 양주 회암사터 제4차 발굴 장면
경기 양주 회암사터 제4차 발굴 장면
경기 양주군 회천읍 회암사 터 발굴이 점입가경이다. 엄청난 양의 건물터가 속속 발굴되는데다 왕실 유물도 출토되고 있어 회암사의 성격 규명을 놓고 학계의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넓이 1만1000여평에 달하는 회암사는 고려 말∼조선 전기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돼 고려 말과 조선 성종 대에 중창됐으나, 16세기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다.

이번 조사는 경주 황룡사지와 익산 미륵사지 발굴 이래 최대 규모의 사찰 발굴이라는 점, 회암사 터가 고려 말∼조선 전기 불교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이곳을 발굴중인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과 경기도박물관은 최근 4차 발굴 조사에서 고려 말∼조선 전기의 건물터 18개소를 새로 확인했다.

97년 발굴 시작 이래 지금까지 확인된 건물터는 총 41개소. 파는 대로 건물터가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단일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건물터를 나오기는 처음.

이번 발굴에서 확인된 건물 배치는 고려말 문필가 목은 이색이 기록한 ‘천보산 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 내용과 크게 다르다.

기전문화재연구원의 김무중 연구원(고고학)은 “지난 3차 발굴 때까지는 목은 이색의 기록이 맞았는데 이번 발굴로 달라지게 됐다. 조선시대 이래로 왕실의 재정적 도움으로 중수 중창이 빈번하면서 건물배치 역시 계속 변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회암사 연구는 이제부터”라고 말한다.

회암사터서 출토된 토제 용머리 장식물

출토 유물도 갈수록 범상치 않다. 이번에 출토된 기와 도자기 금속류 석제품 토제품 중 용이 새겨진 기와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으로, 왕실 사찰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경기 광주 가마에서 제작된 왕실용 자기들이 다량 출토됐다. 회암사 폐사 이후인 1611년 광주 탄벌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자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 김 연구원은 “폐사 이후 승려들의 복구 과정에서 왕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거나 폐사 이후에도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번 발굴에서는 거의 모든 건물마다 다양한 구들이 완벽한 형태로 확인되어 ‘한국 구들의 진열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굴을 할수록 엄청난 결과가 터져나오자 문화재위원회는 9월 이곳 사적 면적을 1만1000평에서 10만평으로 확대 지정했다. 물론 2004년까지 예정된 발굴이 끝나야 좀더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같은 상황이라면 발굴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 발굴단의 분석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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