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강의실 밖으로 나간 '글쓰기 실험'

  • 입력 2001년 11월 26일 18시 33분


대학교수들의 논문표절이 ‘또’ 발각돼 문제가 되고 있지만, 소장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글 쓰고 연구하는’ 원론에 충실한 작업들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글쓰기 실험이 중요한 것은 학자들의 연구 기반을 튼실히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재교육’에 목말라하는 일반인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철학 전공자들의 연구단체인 ‘사회와 철학연구회’가 내는 반년간지 ‘사회와 철학’은 원고 청탁을 하지 않는다. 대신 책 마지막 부분에 앞으로 다룰 주제를 미리 공고한다.

2002년 4월 발간할 3호의 주제는 ‘철학과 합리성’, 2002년 10월 발간 예정인 4호의 주제는 ‘진보와 보수’로 결정됐다. 전공에 관계없이 연구자 누구나 반년에서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해당 주제의 논문을 작성해 응모할 수 있다.

이 잡지에서 ‘심사 후 게재’는 빈말이 아니다. 1호와 2호에서도 응모논문 중 탈락작이 있었다. ‘한국사회와 모더니티’를 주제로 다룬 2호 수록 논문 9편 중 6편은 수정 후 게재된 것이다.

대체로 전문가만을 위한 학술지들은 사회적 교감이 없는 ‘나 홀로 공부’의 고립성을 보여준다. 반면 화급한 현실문제를 주제로 다룬 학회 발표문이나 학술지들은 논문이 아니라 함량 미달의 요약 정리문을 싣는 폐단을 적잖이 보여준다. ‘사회와 철학’은 양자를 동시에 넘어서는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소장연구자들의 글쓰기 작업으로서 또하나 주목할 것은 출판사 책세상에서 펴내는 문고판 시리즈 ‘우리시대’다. 2000년 4월 ‘한국의 정체성’을 시작으로 ‘다이어트의 성(性)정치’ ‘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등 박사학위자나 박사 후 과정자들이 현실의 미세한 흐름에 대응하는 주제를 기민하게 책으로 만들어냈다.

책세상의 김광식주간은 “박사학위를 마칠 때까지 한번도 남에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쓰는 훈련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게 저자들의 공통적인 경험담”이라며 “문고판의 완성도가 들쭉날쭉한 걸 인정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면 젊은 연구자들의 글쓰기 수준 만큼은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책세상 출판사는 이 문고판의 주독자층이 대학졸업 후 10여년이 지나 재교육에 목말라하는 화이트칼라들과 강의실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현실과 상아탑을 가로지르는 저술성과를 내놓는다면 대학이 아닌 사회에서도 ‘학문 옹호 지지자’들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문고판 실험의 중간평가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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