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근로자서 오페라 '디바' 된 창원대 음대 이점자 교수

  • 입력 2001년 11월 19일 18시 24분


가난에 허덕이며 방직공장에서 실을 뽑던 여공이 오스트리아의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금의환향’했다. 올해 초부터 창원대 음대 교수로 일하게 된 이점자 교수(41)의 이야기다. 그는 역경과 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을 ‘나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고 싶다’는 자전 에세이집에 옮겨 최근 펴냈다.

그의 소녀시절은 어딘가 있을 빛을 찾아 캄캄한 지하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온 시간이었다. 빈 속을 채우느라 잔칫집에서 얻어온 상한 음식을 먹고 숨진 큰오빠, 집 안에 곡기가 끊어지자 피를 판 돈으로 쌀 한 됫박을 사온 작은오빠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그는 “끝내 낙관을 잃지 않은 어머니가 가르쳐준 곳, 쑥과 흰 찔레꽃이 만발한 고향 산천(전남 담양)이 보여준 하늘을 좇아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을 채찍질한 삶의 동력은 “세상이 정해준 조건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겠다는 열의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고 찬찬히 말했다.

그가 ‘내게는 노래로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 속에 졸업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중학교를 마치고 찾아간 곳이 마산의 한일합섬 부설 여고. 4시간 수면, 8시간 공장일, 4시간 수업, 그리고 끝없이 매달린 피아노 공부…. 거대한 기계 앞에서 일을 하다가 쏟아지는 잠 속에 톱니 속에 손이 말려 들어간 적도 있었다.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것은 피아노를 계속 치게 하려는 누군가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대학 성악과를 마치자 주변에서는 ‘장한 일을 해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컷, 좀더 실컷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보자는 원(願)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음대생들조차 아무런 뜻도 모르는 채 부르는 외국 오페라의 노랫말들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부터 알고 싶었다.

그는 독일어라고는 ‘나’ ‘너’도 모르는 상태에서 1991년 오스트리아로 건너갔다. 서른한 살 노처녀의 외로운 결단이었다. 처음에는 어학수업용 컴퓨터 앞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빈 프라이너 콘스바토리움 성악과와 오페라과(수석 졸업), 빈 국립대학 음악학과와 음악교육학과를 마쳤다. 동시에 2개 학과에 등록해 공부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든 밤 10시부터 새벽 3시반까지의 시간, CD를 듣거나 사전을 찾으면서 곡 분석을 마치고 방음장치가 된 방에서 홀로 노래하는 ‘올빼미’ 일과였다. 이처럼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춘희’ ‘피가로의 결혼’ 등의 주역을 맡게 됐다.

‘여공에서 오페라 디바’가 됐지만 그는 아직 어려웠던 시절 공장에서 친구들이 불러주던 ‘이점자’란 이름을 자랑스러워한다. 유학생들이 편의상 갖고 있는 그 흔한 ‘현지이름’조차 없다. ‘이점자’란 이름에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힘들게 살아와 작은 것을 이뤘다”며 “나를 무슨 대단한 유럽 오페라계의 거물처럼 치켜세우려는 이를 만나면 할 말이 없다”며 자신의 ‘성취’를 과장하지도 않았다.

또 “내 속의 희망을 따라 실컷 살고자 해왔을 뿐이며 지금도, 앞으로도 ‘실컷 사는’ 그 과정 자체가 내게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학 도중 정류장에서 ‘운명처럼’ 만난 만프레드 크레취마이어(현 빈국립대 연극영화과 교수)와 결혼, 슬하에 아들을 두고 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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